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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9)
정희왕후ㅡ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2)
안종은
 정희왕후가 다섯 차례나 행차했던 온양행궁(약칭 온궁)의 기원은 태조 5년(1396)에 콩 30석을 하사하여 승려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어 착공 10여일 만에 완성된 보잘 것 없는 임시규모의 행궁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3월 16일에 태조가 온천에 도착하여 15일간 머물며 휴양하고 환궁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청도 청주목 온수현(溫水縣) 서쪽 7리에 온천이 있으며 가옥 25간(間)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의 면적으로 25평 규모에 현재 위치는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해당된다. 왕실 행차의 규모가 확대 되면서 온궁의 규모 또한 확장되어, 고종 때 편찬된 ‘온양군읍지’에는 온궁의 둘레가 1,785척(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23년(1441), 육식을 좋아하고 체형이 비만이었다는 세종의 건강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리통증, 종기, 당뇨 증세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도 식별하지 못하는 최악의 안질을 앓고 있었다. 세종 15년(1433) 온행(溫行) 이후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민폐를 염려하여 온궁행차를 자제하다, 안질을 앓고 있는 아산 출신 김구(金鉤) 등 세 명의 신하를 먼저 온천으로 보내어 온천욕에 의한 치료효과를 시험해보도록 한 후, 이들이 모두 완치되어 돌아왔으므로 이에 확신을 얻어 소헌왕후 심씨와 세자(문종)를 거느리고 온궁에 행차하였다.
 
 3월 17일 경복궁을 출발하여 20일에 행궁에 도착한 후 5월 1일까지 약 40여일 체류하며 온천욕의 효험으로 수 년간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완치되었다. 실명의 위기에서 안질이 완치된 기쁨을 기리고자, 온수현을 개칭하여 온양군으로 승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날이
세종 23년(1441) 4월 17일, 온양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기념비적인 날이다.
 
 태조,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여섯 임금이 열 네 차례 온양온천에 행차하였으며 현종은 1665년부터 1669년까지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다섯 차례나 행차하였다.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별세한 1483년 이후 왕실의 행차는, 현종의 첫 번째 온행이 있었던 1665년까지 자그마치 182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는데 이 기간 조선에도 엄청난 역사적 상처가 있었으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온양행궁 또한 왜적의 침입으로 화마에 휩싸여 한 줌 잿더미로 사라졌으니,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광천요기’ 편 ‘온양온천지리급지세’ 항목에 “온천장 서편 가까운 지점에 조선왕조에서 축조한 온궁이라 부르는 궁전이 있었는데, 그 결구(結構 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듦. 모양)가 장려(壯麗)의 극치를 이루었으나 『‘문록(文祿)의 병선(兵燹)’: 일본은 임진왜란을 문록의 역, 경장의 역이라 칭함』에 화재를 입어 오유(烏有 어찌 있겠느냐는 뜻으로 사물이 없어졌다는 뜻)로 돌아갔다”라고 가록되어 있다.
 
 왜적이 불태운 온궁을 다시 복구하였는데 현종 시기로 추정된다. 통상적으로 임금의 온양행차는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수원-평택(진위)-직산(천안)-온양을 경유하는 약 3~5일간의 노정이었고 환궁노정 또한 이의 역노선이었다. 그러나 현종의 네 번째 온행이 있었던 1668년의 온행 후 환궁은, 이 노선을 따르지 않고 온양에서 서울까지 최대의 지름길 노선을 택하였으니 지금의 염치-음봉-둔포-소사-진위로 이어진 직로였다. 이때 현종은 온궁에 머문지 14일 만에 서둘러 환궁을 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남겨둔 여덟 살 세자(숙종)가 갑자기 여름감기에 걸려 고혈에 신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예정을 앞당겨 급히 환궁하게 되었다. 음봉면에서 둔포로 가는 고개가 있어 수 년 전에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고 통행하는데 터널 명칭을 ‘어르목 터널’이라고 한다. 그 유래가 현종의 환궁노정과 관련되니 임금이 이 고개를 넘어서 왔기 때문에 ‘임금이 오신 고개’ 라는 뜻을 지닌 ‘어래현(御來峴)’, ‘어로현(御路峴)이 되었으며 지금도 음봉과 둔포를 연결했던 구도로가 있는 고개를 ’어로목 고개‘ 라고 부른다.
 
 영조 36년(1760), 왕실의 핵심 일원으로서는 장헌세자(사도세자. 정조의 부친)가 마지막으로 행차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가 활쏘기 연습을 하던 온양행궁내 장소에 충청감사가 온양군수에게 자금을 주어 축대를 쌓아 영괴대(靈槐臺)라 이름 짓고 그 경위를 정조에게 보고하니, 뒤주 속에 갇혀 한 맺힌 죽임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정이 사무쳤던 정조는 어필을 내리고 그 곳에 비를 세우라는 명을 내려 영괴대 비각을 세우니 지금도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전한다.
 
 왕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두 청상의 며느리와 손자인 월산대군, 정인지의 아들로 세조와 자신의 둘째 딸 의숙공주의 남편인 사위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대동하고 온양행궁 행차를 할 때 호위했던 관료로는, 세조가 일찍이 “당태종에게 위징이 있다면 나에겐 숙주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한명희와 더불어 세조의 총신(寵臣)이었던 신숙주의 아들 고양군(高陽君) 신준(申浚 1444~1501), 이시애의 난에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세운 공훈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언양군(彦陽君) 김관(金瓘 1425~1485), 폐비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 갑자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임사홍의 아버지며, 손자인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결혼하여 정희왕후와도 겹사돈 관계였던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 1423~1500), 당대의 명필이며 뛰어난 문장가인 이숙함(李淑咸 1429~ ), 예종실록,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손비장(孫比長 생몰년 미상) 등 이었다.

 서울의 궁궐을 떠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년령과 건강상태로 보아 마지막 온양행궁 행차임을 의식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떠나왔지만 막상 온양에 도착하여 행궁에 들어서자, 남편인 세조와 함께했던 온양에서의 지난 일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니 그감개무량함이야 왕후장상이라고 다를 수가 있으랴.
 
 남편인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쿠테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후 재위 14년 동안에, 악성 피부병을 치유하고자 세조 10년(1464), 11년(1465), 14년(1468) 등 세 번이나 온양온천에 행차하여 문무과 과거를 실시했으며, 행궁의 뜰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주필신정(駐蹕神井)’이라고 이름 짓고 우물가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광덕산에서의 사냥, 도고산의 호랑이가 민간에 많은 피해를 끼쳐 호위 장수 우공과 민발에게 명하여 잡아오게 했던 일 등 온양온천에 체류하는 동안 발생하고 처리했던 기록이 세조실록에 실려 있다.
 
 세조 10년(1464)에 온궁행차시 세웠던 주필신정비를 둘러보니 19년 세월의 비바람을 맞아 드문드문 비문이 지워지고 푸른 이끼가 끼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사뭇 마음이 처연해진 정희왕후는 공사비를 내리고 좋은 석재를 사용하여 주필신정비를 개수하도록 명하였다. 19년 전에도 호종한 바 있는 임원준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고 명필 이숙함에게 비문의 글씨를 쓰도록 하니 지금의 ‘신정비(神井碑)’, 또는 ‘신천비(神泉碑)’ 이다. 182년이 지난 후 현종이 온궁에 행차하여 이를 본 후 비문의 마모됨이 심하였으므로 이를 다시 세웠으니 현재 ‘신정비각’에 보존되어 전한다.
 
 정희왕후를 비롯한 두 며느리 등 삼전(三殿)이 온궁에 체류한 40일 동안 서울에서부터 호종한 문신관료들은 신정비 공사 감독 이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심심 파적으로 붓을 희롱하며 글씨나 시를 쓰는 일 이외엔 일이 없어 무료했던지, 온양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지은, 즉 ‘온양팔경(溫陽八景)’ 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가 전한다,
南望廣德橫嵯峨(남망광덕횡차아):남쪽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광덕산 봉우리 가로놓여 있고

香香鳥道中天過(묘묘조도중천과):아득히 새가 날아다니는 길이 중천을 지나가네
朝朝嵐氣作意浮(조조람기작의부):아침마다 생각나는 듯 산 아지랑이(안개) 떠오르니
細細如紈復如羅(세세여환부여라):명주인 듯 비단인 듯 섬세하기도 하구나
彼美山市森萬像(피미산시삼만상):저 아름다운 산시에도 온갖 사물의 형상이 빽빽할텐데
愧未靑鞋去遊賞(괴미청혜거유상):짚신 신고 찾아가 보고 놀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安得畵手掃一幅(안득화수소일폭):화가로 하여금 한 폭 그림을 그리게 하여
掛君高堂素壁上(괘군고당소벽상):그대 집 높은 곳 흰 벽에 걸어 놓으리
 
 온양팔경은 일경(一景) 마다 이숙함과 임원준이 각자 한 수를 지었으니 모두 16수가 전한다. 온양 제5경에 해당하는 ‘광덕조람(廣德朝嵐 광덕산의 아침 안개)’에 대하여 읊은 시로 이숙함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제6경 ‘공곳춘조(貢串春潮 현 인주면 공세리 공세곶에 밀려오는 봄철 조수) 등이 있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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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07 [10:25]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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