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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10)
정희왕후ㅡ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3)
안종은
 정희왕후 윤씨는 태종 18년(1418) 11월 18일, 아버지 윤번(尹璠)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3남 7녀 중 아홉 번째로 홍주(홍성)관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경기도 파주)으로, 파평윤씨는 고려시대 두만강 유역의 북방9성을 개척한 윤관 이래 유수한 명망가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이때 윤번은 훌륭한 가문의 배경에 의지하여 음서로 벼슬을 얻어 종5품 홍주판관으로 있었다. 판관은 소속관청 지휘관의 명을 받아 행정 및 군정을 담당,지휘하는 실무자를 말한다.
 
 청주목사 김매경, 판관 윤번, 충주판관 장안지, 진천현감 진운수, 죽산현감 김종서에게 각각 태(笞) 50대를 때려서 본래의 임지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행대(行臺) 정길흥이 김매경 등이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하지 않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 ‘태종실록’ 18년 1월 17일조
 
 왕의 명령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리의 불법한 일을 규찰하는 관리에게, 물을 가두기 위하여 방죽을 쌓으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적발되어 50대의 태를 맞고 다시 임소로 복직하라는 처벌이다. 이로부터 4년 후 윤번은 세종 4년(1422)에 황해도 신천현감으로 승진하여 재직하던 중, 이권에 개입하여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 6년(1424) 5월 11일조에 “문화현감 왕효건을 곤장 1백을 쳐서 영암에 유배하고, 봉례 유지(柳地)는 곤장 90을 치고, 신천현감 윤번은 곤장 80을 쳤다. 유지는 황해감사 유장의 사촌동생으로 윤번과는 서울에서 같은 마을에 살았다, 유지가 형의 권세를 믿고 문화현감에게 청탁하여 문화현에서 국가에 내야 할 공물인 옻칠 2되 8홉을 대신 납부하고, 문화현감으로 하여금 신천현감이었던 윤번에게 공문을 보내 옻칠 값의 시세를 물었더니 윤번이 값을 올려 화답하였다. 이에 문화현감이 백성에게 쌀 54석을 거두어 유지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암행 조사하는 관리에게 걸렸다”라고 기록되었으니, 윤번은 이권에 개입한 권세가와 짜고 부정축재를 도와준 공범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직위를 이용한 부정축재는 법률적으로도 중형에 처해졌고 사회적으로도 지탄의 대상이었다. 곤장 80대를 맞고 벼슬길에서 쫓겨난 윤번이 4년 후 화려하게 재기한 사건이 있었으니, 자신에게 곤장과 파직의 굴욕을 내린 세종이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배필로  자신의 막내딸을 선택하여 혼인하게 되니 윤번은 일약 대군의 장인이며 임금과는 사돈지간이 되었다. 세종이 자신의 어명으로 파직시킨 부정축재 가담자 윤번의 딸을 며느리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의 소견으론 윤번의 딸에 관한 소문이 이미 궁궐에 까지 훌륭한 규수감으로 알려져 세종과 소헌왕후의 궁금증을 유발하여 궐내의 상궁 등을 보내어 사실여부를 확인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결혼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조선중기 때의 문신 이기(李墍)가 지은 송와잡설(松窩雜說)에 전한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수양대군이 혼인하기 전 처음에는 정희왕후 언니와 혼담이 오갔다. 감찰궁녀가 정희왕후의 집에 가니 이씨 부인이 정희왕후 언니와 함께 나와서 마주 앉았다. 이때 정희왕후는 나이가 어렸는데 짧은 옷을 입고 머리를 땋은 채 이씨 부인의 등 뒤로 다가오니, 이씨 부인이 정희왕후를 밀어내며 말하길 “네 차례는 아직 멀었는데 어찌 감히 나왔느냐?” 고 나무라며 나가게 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감찰궁녀가 이씨 부인에게 말하길 “아기씨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감찰궁녀는 정희왕후를 보면서 끊임없이 칭찬하고 대궐로 돌아와 왕(세종)에게 아뢰어 마침내 정희왕후와 정혼하게 되었다.
 
 이 때 정희왕후의 나이 겨우 11세(만 10)였으며 수양대군은 12세(만 11세)였다. 당시의 조혼풍습에 비추어도 나이 11세 혼인은 너무 이른 편이었기에 어머니 이씨 부인이 네 차례는 아직 멀었으니 나가라고 나무랄 만 하였다. 3남 7녀 중 아홉째로 태어난 정희왕후의 위로는 첫째와 셋째가 언니였고 다섯째부터 내리 여덟째까지가 언니였으니, 당시 민간에서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5세 정도가 관행이었음에 비추어 정희왕후의 위로 적어도 한 두명의 언니는 출가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언니가 선보는 자리에 나가 결국 언니를 제치고 대신 임금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정희왕후가 비록 11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또래 보다 훨씬 성숙하고 야무진 외모의 소유자였으리라 추측된다.
 
 또래의 나이보다 정희왕후가 육체적으로 성숙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 실록에 전하는 친정아버지 윤번의 졸기다. 세종실록 30년(1448) 9월 5일조에 “사람됨이 자의(姿儀)가 풍위(豊偉)하고 성품이 관후(寬厚)하나,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대군의 장인이기 때문에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실록에 기록된 윤번의 외모와 풍채가 제법 크고 살이 붙었으며,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한 성격을 지녔다고 묘사하였으니, 정희왕후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또래의 나이보다 서너 살 위로 보였기에 범상치 않은 기상과 조화를 이루어 감찰궁녀의 안목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궁궐에서 사람이 나와 언니를 선보는 자리에 어린 소녀의 호기심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 감찰궁녀의 눈에 들어 세종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이는 언니의 혼처를 빼앗은 셈이며 수양대군과의 혼인으로 그녀는 11세 어린 나이에 일약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책봉되었다.
 
 정희왕후 사후 62년이 지나 명종 즉위년(1545)에 정희왕후의 둘째 오빠 윤사윤과 남동생 윤사흔의 후손들이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핏빛 살육의 권력투쟁을 벌였으니 역사는 이를 을사사화라 한다. 사화의 발생원인과 전개과정은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야 하고,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수 많은 TV드라마를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사화의 양대 축이었던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은 삼당숙질(9촌)간의 가까운 혈연관계 였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권력은 부자지간이라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 정설인 바, 대저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은 사유의 늪에 잠겨보게 된다.
 
 정희왕후가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왕실의 당당한 일원으로 궁궐을 출입한지 채 1년이 못되어 일어난, 자신에겐 손윗동서인 세자빈 휘빈 김씨 축출사건은 어린 나이의 그녀에겐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휘빈 김씨가 폐빈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 친정집으로 돌아갔으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로 본인은 물론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모두 자결로서 삶을 마감하였다는 소문을 그녀도 전해들었을 것이기에 언행을 극도로 조심하여 이행하였을 것이다.

 세조가 대군시절 14세 때 기생집에서 자는데 기생과 관계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세조가 놀라 발로 뒷벽을 차 무너뜨리고 밖으로 뛰쳐나와 몇 길이나 되는 담을 뛰어 넘자, 그 사내 역시 뒤를 따라 넘기에 세조가 이중의 성을 뛰어 넘으니 그 자 역시 뛰어 넘었다. 세조가 일리쯤 가다가 길 곁에 있는 늙어 텅 빈 버드나무 속으로 숨어버리니 그 자가 자취를 잃고는 투덜거리며 가버렸다. ‘오산설림(五山說林)’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차천로(車天路)가 지은 야담 수필집 오산설림에 수록된 내용이다. 14세 때 기방을 출입했다는 것은 단순히 해석해봐도 수양대군이 조숙했다는 것과 방벽을 걷어차 무너뜨리고 가볍게 월담을 할 정도로 용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야담집 동각잡기(東閣雜記)에도 “세조는 체구가 크고 활쏘기와 말 타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에서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할 때 하루 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서 피묻은 털이 바람에 날아와 겉옷이 다 붉었다. 늘 넓은 소매옷을 입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길 ‘너처럼 용력있는 사람은 이처럼 의복이 넑고 커야만 되겠다.” 하였다.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대군호가 바뀌었는데, 세종이 수양대군의 뛰어난 용력이 근심되어 혹시나 자신의 사후 미래에 왕실 권력다툼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고사처럼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라는 뜻으로 대군호를 변경해 주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야말로 한갓 낭설에 지나지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종 사후 5년도 못가 형제와 숙질간에 피의 살육이 펼쳐졌으니 권력의 속성을 말할 때 참으로 부합되는 설이 아닐 수 없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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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12 [23:58]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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