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전국 대전 세종  충남  천안  아산  홍성  예산  청양  인사  선거  기고  프로농구배구
편집 2017.11.22 [10:52]
검색
라이브폴
진행중인 라이브폴이 없습니다.
 
커뮤니티
기사 제보
명예기자 기사등록
독자게시판
C뉴스 드림봉사단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11)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4)
안종은
 수양대군이 14세의 나이에 기방출입을 했다는 기록이 ‘오산설림’에 전하지만 실록이나 다른 문헌에는 수양대군의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정희왕후와 부부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던 원인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수양대군이 여색을 탐하는 것을 삼갔던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는 왕실은 물론 사대부를 비롯한 양반가에서조차 축첩행위가 당연시되던 관행임에도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 후에도 후궁 한사람 들이지 않았다. 왕의 위상에 걸맞게 후궁을 들여야 된다고 여러 신하들이 주청했지만 “나는 본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며 극구 거절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두 명의 첩실을 두었는데 ‘근빈 박씨’와 ‘덕중’ 이라는 여인이다. 근빈 박씨의 출신과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 설(또는 딸 설)과 궁녀출신 설이 있는데 각기 본관이 틀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러한 오류는 실록의 기록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선원파보 덕원군(근빈 박씨의 장남)파의 기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덕원군파의 기록에 의하면 근빈 박씨의 본관은 선산이고 단종 3년(1455)에 졸하였다지만 근빈 박씨가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박팽년 누이 설(딸 설)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덕원군 후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 혈통의 근원이, 역모의 주역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의 일원인 박팽년의 누이(딸)라는 것은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성종 때 사육신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된 것을 풀어주었으나 복위는 사후 235년이 지난 숙종 때에 이루어졌다). 근빈 박씨의 본관이 선산이라는 것도 오직 덕원군 파보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부계(父系)관련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본관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이며, 아버지 박중림도 집현전 학자 출신으로 성삼문,하위지 등이 그의 문하였으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이라 칭하는 쿠테타를 일으켜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한 후에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로 있었던 명문가문의 후예였다. 세종은 박팽년을 총애하여 그의 딸과 자신의 후궁 혜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풍군을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다. 세조 또한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한 성삼문과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기에 사육신의 거사 실패 후 옥에 갇힌 두 사람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할 정도로 아꼈다. 근빈 박씨가 박중림,박팽년 부자의 딸이라면 첩실의 소생이었을 것이다.
 
 성종실록 14년(1483) 6월 15일 기록에 “이조에 전지하여, 세조의 후궁인 귀인 박씨를 빈으로 삼는다” 라고 하였으니 정희왕후를 광릉에 장사지낸 3일 후였다. 왕실 내명부 품계 종1품 귀인에서 정1품 빈으로 승격시킨 것이니 정희왕후 생전에는 차마 못하다 그녀 사후에 곧바로 품계를 올려준 것이 이채롭다. 연산군일기 10년(1504) 9월 4일 기사에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나이 80세로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에서 머물다가 이무렵 입궐하였는데, 술이 취하면 왕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치열한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 11월 17일 기사에는 “근빈 등 칠푼(七分)이를 내일 아침 일찍 동궁으로 나아갔다가 29일 뒤에 도로 나오게 하고, 음악을 잘하는 젊은 기생 20명을 내일 아찜 일찍 건양문 안에 대령시키라” 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근빈 박씨가 궁녀출신으로 가무에 능한 것이 수양대군의 눈에 들어 마침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박씨와 사육신 박팽년 집안과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끊어내려는, 세조를 비롯한 왕실과 훈구대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된 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세조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을 척살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복위하려는 역모의 주동자인 박팽년의 누이(또는 딸)가 후궁으로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숨기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근빈 박씨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덕원군과 창원군이다. 이들은 성종3년(1472)에 일반 백성 방호련 등 3천여명과 회암사로 가서 불사(佛事)를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왕자의 지위는 충분히 누린 것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덕원군에 비하여 창원군은 어려서부터 방탕하여 궁중법도를 무시했던 문제아였다. 온천에 목욕을 한다는 핑계로 온양에 내려와서 공주 등으로 쏘다니며 수령을 능욕하고 접대를 받으며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고 다니는 등 민폐를 끼쳐 탄핵을 받았으며, 자신의 여종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살해한 것이 탄로나 직첩을 빼앗겼으나 곧 사면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27세 젊은 나이로 죽어 시호를 여도(戾悼)라고 했는데, 지난 허물을 뉘우치지 않는 것을 여(戾)라 하며 일찍 죽는 것을 도(悼)라고 하니 그의 일생과 부합하고 후세 사람에게 경종을 주는 적절한 시호가 아닐 수 없다.
 
 근빈 박씨와 더불어 실록에 전하는 세조의 다른 후궁은 ‘덕중(德中)’이라는 여인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 시절에 여종인 덕중을 취하였는데 미색이 매우 뛰어난 때문이었다. 세조 즉위 후 아들을 낳아 내명부 정3품 ‘소용’이라는 지위의 후궁에 오르기도 했지만 아들이 일찍 죽고 그녀의 신분도 후궁에서 궁녀로 강등되었다. 자식을 잃고 후궁의 지위까지 박탈당한 상실감이 너무 큰 탓인지 역사상 보기 드문 연서(戀書)사건에 휘말려 끝내 교수형에 처해져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궁녀로 강등된 덕중이 환관 송중을 사랑하다가 편지를 전해준 것이 발각되어 문책을 당했고, 뒤이어 귀성군 이준에게 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로 하여금 전해준 바 이에 놀란 이준과 그의 아버지 임영대군이 덕중이 보낸 편지를 들고 달려와 세조에게 보고하니 세조는 이를 폭로하지 않고 다만 덕중에게 죄를 물어 궁궐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계집종을 일컫는 방자(房子)로 삼았다. 그럼에도 다시 환관 김중호를 시켜 이준에게 연서를 보내니 이를 다시 이준 부자가 입궐하여 세조에게 아뢰니 세조가 관련자들을 친국하여 사실관계를 묻자 모두 자복하였다. 환관 최호와 김중호는 난장으로 매질하여 때려죽이고, 덕중은 옛 정을 생각하여 우선 너그러운 처분을 내리려 했으나 재상들이 반대해 교수형에 처했다고 세조실록 11년(1465) 9월 4일과 5일조에 실려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모든 아들들에게 가르치기를 “첩을 대함에 있어 본처에 견줄 수 없다”, “수양은 여색으로 실덕(失德)한 바도 없다”라고 했으며, 며느리들에게는 항상 사치와 교만을 경계하라고 가르쳤으며 정희왕후에게 이르길 “모두 네게 의지하고 있으니 너는 무애(撫愛)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기록과 정희왕후를 광릉에 장사지내고 애책문(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글)에 기록하기를 ‘스스로 더욱 겸손하고 삼가니, 비록 궁중에서 매일 있는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세조에게 아뢰고 행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세조와 정희왕후 부부 사이는 궁중의 사소한 일이라도 함께 공유하는 금슬 돈독한 관계였다. 예로부터 왕은 무치(無恥)라 하여 궁궐내의 여인들과 민간의 규수들을 취함에 큰 제약이 없었으나 세조가 즉위 후 단 한명의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치적 격동의 세월을 함께 겪어낸 정희왕후에 대한 의리나 배려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C뉴스041 www.cnews041.com


 
광고
광고
기사입력: 2012/09/25 [00:08]  최종편집: ⓒ C뉴스041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관련기사목록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3)/ 안종은 2013/02/26/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2)/ 안종은 2013/01/25/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1)/ 안종은 2013/01/08/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0)/ 안종은 2012/12/21/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9)/ 안종은 2012/12/07/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8)/ 안종은 2012/12/01/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7)/ 안종은 2012/11/24/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6) / 안종은 2012/11/07/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5)/ 안종은 2012/10/26/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4) / 안종은 2012/10/19/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3)/ 안종은 2012/10/12/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2)/ 안종은 2012/10/02/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11)/ 안종은 2012/09/25/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10)/ 안종은 2012/09/12/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9)/ 안종은 2012/09/07/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8)/ 안종은 2012/08/29/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7)/ 안종은 2012/08/16/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6)/ 안종은 2012/08/09/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5)/ 안종은 2012/08/02/
[웅녀의 딸들] 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 (4)/ 안종은 2012/07/25/
광고 제호: C뉴스041 / 발행ㆍ편집인: 이정준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충남아 00022 / 등록일 : 2007년 1월 15일
발행소: 충남 아산시 시민로 440번길 10, 201(온천동, 제일빌딩) / 전화: 041-534-0411 / 창간기념일 3월 3일
사업자등록번호: 311-02-29537 / 계좌: 농협 426-01-018594
메일 : munhak21@hanafos.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정준
Copyright ⓒ 2006 C뉴스041. All rights reserved / Contact munhak21@hanafos.com for more information.
C뉴스041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