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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2)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5)
안종은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세종이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니 재위 32년이며 세수 54세였다. 뒤를 이어 문종이 37세로 즉위하였다. 문종은 세자시절에, 격무에 시달려 각종 병환을 앓고 있어 심신이 지쳐있었던 세종으로부터 대리청정을 위임받아 제왕수업을 6년이나 쌓았다. 문종은 즉위 첫 해부터 세종이 길러낸 집현전 학사들을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등의 요직에 대거 등용시켜 유교적 정치토양을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다. 유교이념에 충실한 집현전 출신 관리들은 세종 말년부터 성행한 왕실의 불교 숭배를 문종 즉위 후 빗발치듯 상소문을 올려 반대했는데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 공자의 가르침보다 훨씬 낫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수양대군과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으나, 부왕 세종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한 문종은 불교비판 여론을 번번이 묵살하였다.
 
 문종은 대리청정시에도 집현전 학사들과 밤새워 토론하길 좋아했던 학자풍의 군주였으나 군사와 병법에 관심이 깊어 당시 중앙 군사조직의 핵심인 오위(五衛)를 통솔하는 ‘진법(陳法)과 세종 때 편찬된 ’역대병요‘ 등의 편찬과 주석 과정을 집현전 출신 관리와 학자들에게 맡기고 수양대군에게 감독하도록 했다. 군사 관련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세종 때에도 수양대군이 즐겨 맡았기 때문에 군사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문종이 높이 산 까닭이다. 이 때 권람이 진법과 역대병요 편찬과정의 실무책임자인 교서관 교리로 임명되어 감독관인 수양대군과의 첫 만남의 인연을 맺었으니 이들의 만남이 4년 후 한명회를 포함하여 왕위 찬탈의 단초가 되었던 계유정란의 세 주역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권람(1416~1465), 자는 정경이고 호는 소한당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조선개국공신 권근의 손자이며, 우찬성을 지낸 권제의 아들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 있어 절대적으로 기여하여 세조 즉위 후 거듭 고속승진을 하여 이조판서에 있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한직을 달라고 청하였을 때 세조가 친필 서찰을 내려 답하길 “하늘이 그대를 낳아서 나의 오늘이 있게 하였으니 그대는 실로 큰 공로의 주인이다”라고 공훈을 인정할 정도였으며, 젊을 때부터 명산고적을 찾아 함께 붙어 다닐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던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 수양대군과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권람의 첫 만남은 수양대군 35세, 권람 36세 때의 일로, 신숙주가 지은 권람의 신도비명에 두 사람의 관계를 “공은 일거에 향시, 회시, 전시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다. 그 때 세조가 잠저에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병법서에 주석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공이 시종이 되었다. 세조는 공에게 큰 재주가 있음을 알고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35세 늦깎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권람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 권제의 주벽과 폭력에 시달린 불우한 세월이었다고 한다. 권제는 문장에 능하고 달변가였으나 기생 첩에게 빠져 본처를 내쫓아 이를 말리던 딸과, 자식들의 서모역할을 하던 첩을 발로 차서 때려죽인 무도한 사람이었다. 권람이 울면서 여러 번 간하였지만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출하여 한명회와 어울리길 마치 관중과 포숙아 같았다고 실록에 전한다. 권람보다 한 살 위인 한명회도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를 못했는데 권람의 주선으로 37세에 벼슬이라고 할 수도 없는 미관말직인 개경(송도)의 경덕궁지기로 나가게 되어 수양대군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권람과 한명회는 수시로 수양대군의 집에 드나들며 쿠테타 모의를 하였는데 인조 때 권별(1589~1671)이 저술한 문헌설화집 ‘해동잡록’에 권람과 수양대군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단종이 어린데다 세종의 아들들인 8대군이 강성하여 민심이 위태롭게 여겼는데 수양대군이 어려움을 바로세울 뜻을 갖자, 권람은 수양대군의 집에 수시로 출입하며 매우 가까이 하였다. 매번 밤늦도록 대화가 길어지니 권람이 오면 하인들은 서로 눈짓하며 한갱랑(국을 식히는 나으리)이 또 오셨다고 하였다. 세조가 즉위 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권람을 가리켜 정희왕후에게 말하길 “이 사람이 전날의 한갱랑이오” 하였다’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효성스러운데다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학문하는 것에 진력하고 선비들을 사랑하여 토론하길 즐겨했던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군주였다. 그러나 병약하여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때문에 결과적으로 왕권에 눈이 먼 동생 수양대군에게 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지난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문종이 5~6년만 더 살아 단종이 17~8세에 즉위했더라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혀 새로운 궤적을 그렸을지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부왕인 세종의 체형을 닮아 비만형이었다는 문종은 왕위에 올라 겨우 2년 3개월 만에 등창(등에 생긴 종기)으로 사망하였다. ‘연려실기술’에 “대리청정한지 6년 만에 세종이 세상을 뜨니 문종은 관 앞에서 왕위에 올랐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우니 눈물이 적삼 소매를 다 적셨다. 여막에 거처하면서 물과 미음조차 입에 대지 않았으니 슬픔이 몸을 상할 정도에 이르러 정도를 벗어난 점이 있었다. 이때 막 등창이 낫기 시작하여 상처 딱지가 덜 아물었으므로 모든 대신들이 따듯한 방에 거처하여 완전히 치료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궤연 앞에서 추운 겨울이든 더운 여름이든 잠시도 예절을 폐하지 않으니 애통하고 초췌한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세조실록 총서에 의하면,  문종 1년 3월에 수양대군 집의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내어 우는 괴변이 발생하였다. 어찌하여 가마솥이 스스로 우는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무슨 징조인지를 몰라 의혹했는데 수양대군은 이를 잔치를 베풀 징조라고 해석하였다. 비파라는 무당이 달려와 정희왕후에게 말하길 이는 대군께서 39세에 등극하실 징조입니다 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세조가 자신의 집권 후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일종의 암시적이며 예언적 장치를 동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가마솥이 스스로 우는 해석을 수양대군은 잔치를 베풀 징조라고 하였듯, 괴변이 발생한지 몇 달 후에 수양대군과 정희왕후 부부는 큰 며느리를 맞이하게 된다. 큰 아들의 군호는 도원군으로 나이는 14세였으며, 며느리는 한확의 막내딸로 15세였다. 이 며느리가 성종의 생모이며, 추존왕 덕종의 왕비로 소혜왕후라고도 하며 연산군의 할머니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에 걸친 4대 동안 궁궐 내명부의 막후 실세였으며 후일 연산군의 생모를 쫓아내 죽였다는 일로 연산군에게 행패를 당하여 삶을 마감한 인수대비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의 혼사는 대개 여성들이 주관하는 편인데, 이 결혼은 내막적으로 상당히 정략적인 색채가 짙어 보인다.
 
 당시 환확은 조선왕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할 때에도 명나라 황제의 고명장을 받아들고 온 사람이 한확이었으며,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관계를 도맡아 처리한 명나라 황제의 칙사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확의 두 여동생이 공녀로 선발되어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의 후궁과 5대 선덕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확의 막강한 배후세력 때문에 세종은, 자신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계양군 이증과 한확의 둘째 딸을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다. 계양군은 수양대군의 열 살 적은 이복동생 이었으며, 정희왕후로서는 계양군의 부인인 한확의 둘째딸이 손아래동서, 한확의 막내딸은 큰며느리가 되니 강력한 인맥의 우군을 확보한 셈이었다.
 
 수양대군과 정희왕후가 큰 며느리를 들인 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문종이 세상을 떠나니 재위기간이 불과 2년 3개월, 때는 문종 2년(1452) 5월이었다. 뒤를 이어 겨우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고립무원의 어린 임금 단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단종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의 대신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왕실 종친세력, 이들의 견제와 갈등 속에 바야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안개정국이 펼쳐지게 되었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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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02 [00:45]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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