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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3)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6)
안종은
 12세에 등극한 단종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도 없었기 때문에 수렴청정도 불가능하였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후궁으로 입궐하여 딸(경혜공주)을 낳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종 23년(1441) 단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3일만에 사망하니 24세였다. 문종이 죽기 전에 유력한 가문의 딸을 아들의 배필로 맞아들여 후일을 대비하였었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달리 흘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단종이 왕비를 맞이하려면 문종의 3년상을 치른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궁실내명부에 웃전이 한명도 없어 텅텅 빈 적막강산이었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궁을 비워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단종의 할머니뻘인 세종의 후궁으로 당시 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위치에 있던 인물은 신빈 김씨의 자식들과 혜빈 양씨였다. 신빈 김씨는 슬하에 큰 아들 계양군 이증을 비롯한 6남 2녀를 두었는데, 후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안평대군 등의 정적을 살해하고 단종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찬탈한 뒤 좌익공신 44명을 책봉했을 때 신빈 김씨의 아들 계양군 이증과 익현군 이련은 1등 공신 7인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이복형인 수양대군을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빈 김씨는 본래 궁궐의 물자와 잔치를 담당하는 부서인 ‘내자사’의 노비로 있었는데, 13세 때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궁인으로 발탁된 후 후일 세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으며 문종 즉위 후 세종 후궁들의 귀의처로 궁궐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준 사찰의 기능을 담당한 자수원(자수궁)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었다.
 
 단종이 즉위 했을 무렵 고립무원인 어린 왕을 가까이에서 돌보아준 유일한 사람은 혜빈 양씨였다. 혜빈 양씨는 양반가문 출생으로 병약한 문종의 세자시절 유모역할을 담당하던 중 세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죽은 후 단종의 양육을 맡았던 관계로 문종과 단종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문종은 즉위 후에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혜빈 양씨를 다른 선왕의 후궁들과 달리 대접하여 자수원에 보내는 것을 주저하여 따로 거처를 만들었다고 실록에 전한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위 찬탈 세력에게 혜빈 양씨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궁안에 들어와 단종을 보필하던 혜빈 양씨도 결국 궁궐 밖으로 쫓겨나고 세조가 즉위하자 가산도 적몰되고 청풍으로 유배되어 셋째 아들 영풍군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단종은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기엔 너무 어렸다. 아무리 총명하다고해도 그 나이에 국사를 친히 풀어갈 수는 없었다. 문종은 임종을 앞두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의정부 3정승을 중심으로 대신들이 인사권을 전횡하는 ‘황표정치’가 시작된 배경이었다. 수많은 관리를 임명하고 파면시키는 일을 어린 국왕은 알 수 없으니 6조의 판서들이 복수로 천거한 관리의 이름 위에 3정승이 상의하여 노란 표시를 해서 국왕에게 올리면 국왕은 그대로 결재만 하는 형국이니 권력이 3정승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집중되었다.
 
 의정부 대신들은 어린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실 종친세력을 정치권에서 밀어내고자 철저히 배제하였다. 특히 수양대군은 기회만 되면 언제든 숨겨둔 야심을 드러낼 위험인물로 간주되었기에 견제가 더욱 심하였다. 의정부 대신들은 혜빈 양씨가 입궁하여 단종을 보실피도록 조치하였으며, 수양대군의 바로 밑 동생인 안평대군을 내세워 견제하는 것도 부족하여 급기야 ‘분경(奔競)’이라는 족쇄를 채우기까지 하였다. 분경이란, 관리가 권력실세 등의 권문세가를 분주하게 찾아다니며 승진을 로비 청탁하는 것으로 당시의 분경금지는 수양대군을 철저히 고립시키기위한 방편이었으나, 수양대군과 왕실 종친들의 강력한 반발로 곧 유명무실해졌다. 
 
 의정부 대신과 안평대군의 결탁으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된 수양대군으로서는 자신의 명운을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정국이 어찌 굴러가든 정치와는 담을 쌓고 왕의 큰 숙부로 남아 호의호식하며 일생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어린 조카 단종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것인지의 기로에서 신속한 양단간의 선택만이 주어졌을 뿐 더 이상 좌고우면하며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 겨우 12세인 조카 단종이 의정부 대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왕권을 행사하려면 족히 7~8년은 더 기다려야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절대권력에 대한 의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경덕궁지기로 있던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하고 사직하여 신병치료차 동래온천에 갔던 권람마저 돌아오니 수양대군은 당대 최고의 모사 한명회와 권람을 중심으로 쿠테타 모의를 진행시켜갔다. 한명회와 동문수학하던 서거정 등은 벌써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계에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40을 목전에 둔 낙방거사 한명회에겐 정국의 대반전을 주도하여 일약 공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한 남은 삶을 정치낭인으로 보내는 수 밖에 없었으며, 권람 또한 늦깍이에 과거에 급제는 하였으나 중앙에 이렇다 할 연줄도 없는 처지였으니, 그 둘에게는 수양대군을 보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자신들의 부귀영화는 따놓은 당상이었기에 이런 저런 셈법으로도 목숨을 걸어 한판 도박을 벌일만한 형국이었다.
 
 한명회! 불세출의 지략과 권모술수에 능하여 세조가 늘 ‘나의 장자방’이라 칭할 정도로 꾀와 수단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었기에 모든 비밀스런 계책과 모의를 주도하였다. 원주 범천사 아래 머물던 당대의 석학 ‘유방선’의 문하에서 한명회, 권람 등과 동문수학한 서거정의 문집 ‘사가집’에 “공이 잉태된지 일곱달만에 태어났으므로 사체가 아직도 덜 자랐다. 온 집안 사람들이 기르지 않으려하니 유모가 솜으로 싸서 밀실에 두었는데 뒤에 형체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자라감에 따라 골격이 기걸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의 묘비에도 ‘등과 배에 검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별의 형상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신체적 구조의 특이성을 묘사하고 있다.
 
 예종과 성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두 번이나 국구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는데 노년에 이르러, 벼슬에 욕심이 없어 은퇴한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한강 남쪽 경치 좋은 곳에 ‘압구정(오늘날 압구정동의 유래가 되었다)’이라는 정자를 호화스럽게 지어놓고 말로만 은퇴를 언급할 뿐 높은 벼슬과 녹에 매어 전혀 떠날 의사가 없었다. 이에 결기 곧은 포의(布衣)의 선비 이윤종이 정자 아래를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읊으니 “정자가 있으나 돌아가지 않으니 이 인간이 참으로 갓쓴 원숭이로다”라고 조롱하였을 정도로 탐욕이 많았으며 조야(朝野)의 상소가 빗발쳐 실직에서 물러나 권세가 떠났어도 이를 슬퍼하였다고 ‘죽창한화’에 전하니 대저 예나 지금이나 자리에 연연하여 진퇴의 시기를 놓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세간의 평이 어떠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로 합류하면서 구태타 모의는 급진전되는데 당면 문제는 구태타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 였다. 통상적으로 국장기간이 5개월이니 문종의 국장이 끝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선왕의 국장기간에 구태타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비록 그 구태타가 성공했어도 당시의 윤리적 관점에서 세간의 지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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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12 [00:33]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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