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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4)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7)
안종은
 단종 즉위년(1452) 9월 1일 문종을 현릉(경기도 구리시 소재)에 장사지내는 것으로 국장절차가 끝난 후 단종 즉위 인준과 면류관을 보내온 명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창하던 정국에 수양대군이 아연 사은사로 자청하고 나섰다. 사은사의 대표인 정사는 3정승이 돌아가며 맡는 것이 관례로 우의정 김종서의 차례였으나 김종서가 70고령을 이유로 사양하자 수양대군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쿠데타의 기회를 엿보던 수양대군으로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 또한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연왕 주체(영락제)의 후손이었기에 명나라 황실 상황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기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할만한 준비가 부족하다는 판단과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세력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나름대로 치밀하게 의도된 행위였다.
 
 수양대군의 사은사 자청에 측근들이 모두 놀라 만류하였다고 실록과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는데 권람은 “대사가 깨트려질까 염려스럽고 큰 일이 물 건너갔으니 어찌 이리도 생각이 없으신지요?” 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거사를 목전에 둔 주장이 자리를 비우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4~5개월 여정의 명나라 사행을 자청하였으니 측근들의 만류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는 수양대군의 원모심려를 헤아리지 못했던 측근들의 기우였다. 사행을 극구 반대하는 권람에게 하는 말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대가 한명회와 더불어 나에게 명나라에 가지 말라 하지만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의 간사한 계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나는 홀몸으로 후원하는 사람이 없다. 저들이 만약 난을 일으키면 장차 묶여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니 비록 여기에 있다 하여도 무슨 이익됨이 있을 것이며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물며 전에 생각했던 바와 같이 황보석과 김승규를 내가 데리고 가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없는 동안 저들의 무리가 거리낌이 없어서 더욱 방자할 것이니 한명회와 함께 저들의 종적을 비밀히 염탐하라.”  -단종실록 즉위년(1452) 10월 4일조-
 
 수양대군은 쿠데타의 시기가 아직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문종의 급서 후 장례까지 불과 5개월 동안 자신들이 모의하고 준비한 것만 가지고는 이미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대신들의 세력을 꺽을 수도 없으려니와, 비록 당대 최고의 책사 한명회와 권람을 수하에 두었어다한들 조정내에 우군 세력과 쿠데타 결행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무력동원 계획이 전혀 확보되지 못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조선을 비운 사이에 혹시는 자신과 자신 주변에 불미스런 일의 발생을 염려하여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반인질로 삼아 사절단에 포함시킨 후 공조판서 이사철을 부사,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삼아 명나라로 떠나게 된다. 이미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신료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후일 계유정란에 가담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이사철, 세조 즉위 후 성삼문 등 집현전 동지들을 저버리고 일신의 권세와 영화를 탐한 변절자라는 세간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숙주를 사행기간 중 확실한 지지자로 만들었다.
 
 신숙주! 성종실록 6년(1475) 6월 21일조 기록 그의 졸기에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일이나 내용의 핵심적인 줄기를 파악하여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않았으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할 큰 도리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중히 여겼다”라는 격찬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과 중요한 업적을 후세에 남긴, 조선왕조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명신이다. 또한 그의 이름에 빗대어 ‘숙주나물’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듯 변절자의 표상으로 자리매김되어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동전의 양면처럼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시류에 영합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손 치더라도 그의 선택이 극악스런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을뿐더러 조선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수많은 업적은 결코 폄하되어선 안 될 것이다.
 
 단종 즉위년(1452) 10월 12일 한양을 떠나 명나라에 갔던 수양대군 일행이 5개월여만인 단종 1년(1453) 2월 26일에 귀국하였다. 수양대군이 조선을 비운 사이에 한명회와 권람 등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으로 쿠테타에 동원할 무인들을 포섭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도성의 야간 순찰과 경비를 담당하는 순라군을 지휘감독하는 홍달손을 포섭하고 궁중을 지키며 왕을 호위하는 내금위 무사들인 양정, 유수 등도 포섭하여 쿠테타 준비를 모두 마쳤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살해한 단초를 제공했던 계유정란의 새벽이 밝아오니 10월 10일 이었다. 수양대군의 사저로 한명회, 권람, 홍달손 등 쿠테타의 핵심 주동자가 모여, 16세 때문과에 급제하였고 북방의 6진 개척을 주도하여 대호(大虎)라 일컫던 조야의 신망이 가장 두터운 김종서를 기습 살해하기로 모의하였다. 포섭한 수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활쏘기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 후 밤이 되자, 수양대군이 나서서 쿠데타 일정을 설명하니 여러 무사들이 대신을 죽이는 것은 역모인지라 먼저 왕에게 보고하여 승낙을 얻은 후에 하여야만 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명회가 말하길 “길옆에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이 결단을 내리시오”, 홍윤성 또한 “용병 하는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 송석손, 민발 등이 수양대군의 옷자락을 잡고 말리니 수양대군은 대노하며 “너희들은 가서 고발하라” 하고 활을 집어들고 일어나 말리는 자들을 발로 차면서 “따르지 않을 자는 가라. 나는 혼자 가겠다. 만약 어리석은 고집으로 기회를 그르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죽이리라” 하고는 드디어 나서서 중문에 이르니 기다리고 있던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혔다”고 계유정란 당일의 상황을 실록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쿠데타 출정을 나서는 남편에게 준비한 갑옷을 입혔다는 것은 정희왕후 또한 쿠데타에 관한 전모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실록에도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기회를 보아 정난하였는데 당시 부인이 계책을 함께 논의하고 대군을 도와 대사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 10월 2일 기록에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황보인 등이 거사를 눈치 챈 사실을 아뢰고 의논하였다' 라고 쿠데타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것을 전하는데, 야사에 의하면 정희왕후가 말하길 “우리는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으며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10일을 넘기지 마세요” 라고 쿠데타 결행을 촉구했다고 한다.
 
 쿠데타의 성패여부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결정될지는 정희왕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쿠데타가 성공한다는 것은 시기상의 문제일 뿐 단종을 내쫓고 자신의 남편인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게 되고 자신은 나라의 국모인 왕비가 되는 것이다. 대의명분 따위야 남성들의 전유물이지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허접 쓰레기에 불과할 뿐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궁궐의 안주인인 왕비자리가 탐나는 것이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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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19 [16:38]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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