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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5)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8)
안종은
 정희왕후가 입혀준 갑옷을 속에 입고 집을 나선 수양대군은 곧바로 무사들을 앞세우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기습 살해하였다. 이때 단종은 궁에서 가까이 있는 경혜공주의 사저에 있었는데 경혜공주는 단종의 누나로 세종 때 영양위 정종과 혼인하였다. 정종은 단종 즉위 초기에 병조판서를 지냈을 정도로 단종이 믿고 의지하여 따랐다. 단종을 위협해서 나라에 위급한 변란이 발생하여 즉시 입궐하라는 초패(招牌)를 모든 대신들에게 돌리고, 한명회의 지휘에 따라 입궐하는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민신 등을 철퇴로 쳐 죽인 다음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사사시키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충청감사 안완경도 유배 보낸 후 사사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이조·병조판서를 겸직하고 수양대군 일파가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니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무력을 동원하여 반기를 들었던 김종서의 심복인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마저 제거하니 이제 남은 것은 어린 조카를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일 뿐이었으나 세간의 여론을 의식해서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곧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旦)과 비견하길 즐겨 말했다. 주공 단은 형인 무왕이 죽자 어린 조카 성왕을 즉위시키고 섭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관숙, 채숙 두 동생을 진압하여 죽이고 주왕조의 제도문물을 창시하여 천년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공헌하였다. 공자가 평생토록 흠모하여 꿈에서라도 매양 뵙기를 바랐던 현인으로 모든 유학자들에게 고대 중국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단종은 부왕 문종이 급서하여 어린 나이에 즉위하다보니 국정전반을 파악하고 시의적절한 정책과 적재적소에 관료의 배치 등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왕권의 미약으로 인한 국정의 안정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정치적 책무를 수행했던 김종서 등의 행위를 역모로 포장하여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말이 좋아 정란이지 완벽한 쿠데타였다. 그로부터 오백여년이 지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일부 몰상식한 정치가 및 법률가에 의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가 없다’는 얼토당토한 논리로 면죄부를 주기도 했지만, 동서고금을 통하여 역사상의 모든 쿠데타는 명분 없는 불의(不義)였다는 것은 결코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부왕 문종의 3년 상을 치른 후에나 혼례를 치르겠다는 단종의 의사를 묵살하고 권도(權道)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송현수의 딸을 왕비(정순왕후)로 맞아들이니 단종보다 한 살 위인 15세였다. 계유정란 쿠데타로 수양대군이 국정을 장악하였으나 스스로 보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양대군의 야욕을 경계하며 적대적인 행동을 취할 장애물을 제거하여야만 했다. 수양대군에게 반기를 들고도 남음이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공교롭게도 그의 형제들이었으니 금성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수양대군의 넷째 동생이었으며, 화의군 이영은 세종과 영빈 강씨의 소생으로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수양대군 일파는 이들이 행한 작은 일을 과장하여 크게 꾸며 참소하거나 유배 보내고, 궁중의 내시 엄자치까지 추방하니 모두들 수양대군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단종을 고립시키고 공포정국을 조장하여 단종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도록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계유년의 쿠데타가 있은지 1년 9개월만인 단종 3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 일파의 압력에 자신을 지켜주던 마지막 보루였던 혜빈 양씨를 청풍으로, 상궁 박씨를 청양으로, 금성대군 유는 삭녕에, 한남군 이어는 금산에, 영풍군 이천은 예안에, 매부 정종은 영월로 유배 보낸다는 교시를 내린 후 내시 전균을 불러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한다는 뜻을 써주었다. 경회루 대청에 200여명의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수양대군은 몇 번 양위를 받을 수 없다고 늑대의 눈물로 호소하며 거절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였다. 단종이 동부승지 성삼문으로 하여금 상서사관청에 가서 대보를 가져오도록 명하고 이를 전균을 통하여 수양대군에게 넘기는 것으로 양위절차가 끝났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신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단종을 높여 상왕으로 받들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전에 의도된 행위였다.
 
 단종은 양위한지 열흘 만에 경복궁을 내주고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정희왕후 윤씨는 궁궐의 안주인이 되어 내심 그토록 갈망하던 왕후자리에 오르니 개인적으론 득의만만한 세월이었다. 큰아들 도원군(의경세자, 덕종) 내외는 세자와 세자빈이 되었고, 둘째아들(예종)이 6세, 큰 손자(월산대군)는 7개월된 영아였으며,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혼인시킨 딸 의숙공주에게 사저를 물려주니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의 극치였다. 지아비 세조의 대를 이어 큰아들이 왕위를 잇고 더 나아가 큰손자가 등극하는 생각만하여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지 1년, 정국을 한손에 틀어쥔 세조는 더욱 강력한 친정체제 왕권을 구축하였지만, 명분없는 쿠데타를 일으킨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의 국왕과 왕비로 책봉한다고 승인하는 고명을 들고 황제의 칙사가 오는 시점에 맞추어 연회장에서 세조와 세자, 한명회를 비롯한 측근들을 제거하고 상왕인 단종을 복위하려는 모의가 탄로나 조정에 피바람이 부니 역사기록은 이를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라고 칭한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 하네
黃泉無一店(황전무일점): 저승에는 주막 하나 없다 하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을고
 
 사육신의 거사 전개과정과 결말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추강 남효온의 저서 추강집 중 ‘사육신전’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후 숱한 야사, 일화의 단골소재였던 관계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하고, 2008년 서울대학교 입시 논술고사에 ‘이 시에 나타난 삶과 죽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나타난 작가의 생각을 기술하시오’ 라는 논제로 출제되었던 성삼문의 절명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뜻있는 선비들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초야에 묻혀 숨어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 향한 일편단심을 가슴에 묻은 채 삶이 다하는 날까지 지조를 지킨 생육신을 비롯하여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비들이 충의를 실천하였으니, 조상치(曺尙治. 생몰년 미상) 또한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세종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나이가 벼슬길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될 터임에도 사직 상소를 올리니, 세조는 예조참판을 제수하여 그를 곁에 두고 싶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에는 조상치가 고향 영천으로 내려갈 때 세조는 오히려 호조에 명하여 동대문 밖에서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미 자신에게 마음이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송별연을 이용하여 자신이 어진 인재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낙향한 후 세상을 등지고 방랑생활을 즐기며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는 조석으로 영월 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며 슬퍼하다가 전 병조판서 박계손이 부친 박도를 모시고 일가와 함께 은거하던 철원군 복계산 기슭 초막동으로 합류하였다. 단종이 살해당하자 김시습 등과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의 초혼제를 지내고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의 묘비에 새길 비문을 ‘魯山朝 副提學 逋人 曺尙治之墓’(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지묘)라 지어놓고 묘지 앞에 세워달라고 유언하였으니, 자신은 노산군(단종)의 신하라는 뜻이 담겨있고 관직 앞에 붙는 부제학의 품계인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를 일부러 쓰지 않은 뜻은 단종을 구하지 못한 죄인 된 신하를 자처함이다. 포인이란 망명, 도망 등의 뜻이 담긴 달아난 신하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으니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안자춘추’에 기록된, 신하된 자의 아홉 가지 도리 중 ‘구차스럽게 벼슬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공직사회에 나가보려는 축생들이여! 마땅히 경계 있으라.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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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26 [08:39]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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