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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6)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9)
안종은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의 강봉과 영월 유배와 관련하여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 실패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는 자료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사육신의 거사 실패 후 1년의 세월이 지난 세조 3년(1457) 6월 21일.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단종에게 결국 죽음의 사지로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장인 송현수의 역모에 관한 일 때문이었다. 실록에는 백성 김정수란 사람이 정희왕후의 오빠 윤사윤에게 송현수와 권완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사실을 말하니 윤사윤이 이를 다시 세조에게 아뢰어, 상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하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청령포에 20여일 머물다 홍수로 인하여 영월부중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 생활하던 중, 순흥으로 귀양가있던 숙부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노산군에서 폐서인된 후 그해 10월 살해당하니 17세의 나이였다.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민간무속신앙에서 신격화되어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설 등으로 표출되었으며, 병자록, 전화적책 등의 문헌에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때 향을 피워 하늘에 빌면 비가 쏟아졌다”라고 기록하여 단종이 기우에 효험있는 신령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 3년 10월 21일 두 번째 기록에는 양녕대군 이제와 영의정 정인지 등의 상소에 세조가 ‘금성대군 이유는 사사하고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라는 윤허를 내렸으며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서 장사지냈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날 실록의 첫 번째 기사에 ‘아침 조회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노산군과 금성대군 등의 처벌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참(朝參 5-6일마다 근정전 앞에서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하여 대규모로 열던 아침조회)에서 대간의 건의를 묵살했던 세조가 경회루에서 활쏘기 행사를 관람한 후 포상하고 자신의 큰 숙부인 양녕대군과 영의정의 상소로 인하여 금성대군과 송현수의 역모행위건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은 당일에 가능하겠지만, 멀리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 이 소식을 당일에 들을 수도 없으려니와 또한 이를 듣자마자 목매어 자살했다는 기록은 하루일정 상 성립될 수 없고 더군다나 예로서 장사지냈다는 것은 날조된 기록임에 분명하다.
 
 이자(李耔 1480~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에 “실록에 노산(단종)이 영월에 있다가 금성대군의 사사소식을 듣고 자진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여우나 쥐 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 지은 말이다. 훗날 실록을 편찬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무리들이 아닌가?”라고 기록하여 단종의 죽음이 명백히 세조에 의한 사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박종우가 쓴 ‘병자록’에는 ‘10월 24일 유시에 노산군을 사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놓다

 
 이 시조는 단종의 유배 또는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필자의 학창시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널리 인구에 회자된 유명한 작품이다.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을 호위하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절해고도 청령포에 단종을 가두고 떠나기 전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처럼 아프고 애석한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거니와, 병자록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렀으나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구르기에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아래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 온 까닭을 물었으나 차마 대답을 못하였다. 노산을 모시고 있던 통인 한 명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노산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과 검은 안개가 밤새 걷히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첫째 아들인 세자(의경세자)가 단종의 죽음을 전후하여 돌연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두고 오늘날까지 항간에 널리 유포되길 이는 단종의 모후였던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출처는, ‘연려실기술 문종 고사본말 축수편 소릉(현덕왕후의 릉)의 폐위와 복위’의 기록에서 연유 한다. 기록에 전하길 하루는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세자가 죽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소릉을 파헤치는 변고가 일어났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실록은 세자의 사망이 9월 2일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단종의 사망일은 실록의 기록을 따라도 그 해 10월 21일이며 여타의 문헌엔 24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일 자신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세자의 죽음은 세조와 정희왕후에겐 엄청난 고통과 상심이었지만 이는 그 서막에 불과할 뿐 이였다. 정희왕후의 입장에선 비록 강 건너 불구경 할 처지는 아니지만 시동생과 조카의 유배와 죽음 등 살육이 자행되는 정국의 전개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영역일 뿐이고 또한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들의 죽음일 뿐이며, 또 그러한 죽음이 지아비 세조가 차지하고 있는 옥좌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국모의 지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의 죽음은 전혀 다르다.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던져서라도 막아내야 한다.
 
 의경세자의 병세가 실록에 처음 언급된 날은 세조 3년 7월 27일이다. ‘세자가 편찮으니 정인지, 강맹경 등을 불러 약을 의논하였다’는 기록이다. 다음날 28일 기록에는 중 21명을 경회루 아래로 불러들여 밤새도록 불법을 행하였으며, 8월 2일에는 토속신앙에 의지하여 전국의 명산 등으로 관리를 보내 향과 축물을 내려 기도하게 하였다. 세자의 병세가 악화되어 4일에는 세조와 정희왕후는 세자를 데리고 궁궐을 떠나 옛 집으로 피접을 나가 불법에 의지하여 불공을 드려 일시적으로 차도가 있는 것 같았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9월 2일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20세였다. 이런 와중에 세자 발병 3일후인 7월 30일에 세자의 둘째아들이 태어났으니 자을산군이며 후일 13세로 왕위에 오르는 성종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이야 왕후장상이라고 다를리 없겠지만, 왕실의 법도엔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속히 후계자를 세워야했다. 원칙적으로는 죽은 장남인 의경세자의 큰 아들이며 원자인 월산군 이정이 후계 1순위였지만 당시 나이가 겨우 4세에 불과하여 어쩔 수 없이 월산군보다 4세 위이며, 죽은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으로 세자를 삼았다. 해양대군은 세조와 정희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이며 당시 8세로 11년 후 세조 사후에 19세의 나이로 보위(예종)에 올랐으나 재위 1년 만에 사망하니 또한 겨우 20세였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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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1/07 [23:47]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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