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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7)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0)
안종은
 요절한 의경세자에겐 세자빈 한씨 외에도 후궁이 3명이 있었다. 세조가 즉위하고 장남인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 신료들은 왕실의 번성을 위해서 관행에 따라 세조는 물론 세자에게도 소실을 들일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은 후궁을 들이지 않고 세자에게만 소실을 들이게 하여 금혼령을 내리고 세자의 소실로 윤, 신, 권 소훈(昭訓)을 봉하였다. 이들이 동궁에 들어온지 1년도 안되어 세자가 죽었으니 신방조차 차리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세자와 3명의 소실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들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3명의 소실들이 동궁에 들어온 직후에 세자의 장인인 한확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병이 들어 객사하는 탓에 세자 또한 사위로서의 예를 차려야 했을 것이고 장인상이 끝나고 본인마저 병석에 누워 있다 이내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합방도 못한, 명색이 세자의 후궁일 뿐 15~6세 동정녀로 청상과부가 되어 남은 생을 수절하며 살아가야 했으니 차라리 아니 삶만 못한 시대의 비극이었다.
 
 후일 권씨와 윤씨는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실록에 등장하게 되는데 연산군일기 4년(1498) 7월 12일조 기록이다.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하여 실록청에서 거두어들였던 사초 중에서 김일손이 쓴 내용 중에 일부가 문제가 되어 김일손은 의금부에 잡혀와 연산군의 국문을 받았다. “권귀인은 덕종(의경세자)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라는 것과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어가가 따랐다”라는 사초의 기록이 연산군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세조가 죽은 세자의 후궁들인 며느리와 관계를 가지려 시도했다는 내용인 것이다. 김일손은 이의 출처를 권씨의 조카이며 양자인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항변했으며,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도 사초에 기록한 사실이 밝혀져 유자광, 이극돈 등의 주도로 무고한 선비들이 회생당하니 무오사화였다.
 
 권씨는 성종 25년(1494)에 죽었는데 연산군 즉위 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위에 가담했다는 죄로 작위가 삭탈되고 서인으로 강등하여 무덤까지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였다. 관을 쪼개게 하였으나 시체를 찾지 못하여 논란이 있었다. 권씨는 불교를 믿었는데 권씨가 죽자 혜명 등의 비구니가 권씨의 시체를 불교 예법에 따라 몰래 화장을 한 후 가짜 무덤을 만든 것으로 판명이 나자 연산군은 매우 진노하여 “당초 시체를 불태운 비구니 혜명 등을 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연산군일기 10년(1504) 4월 26일조에 전한다.
 
 형의 급서로 8세에 세자가 된 해양대군(후일 예종)은 11세 되던 세조6년(1460) 4월 11일에 세조와 더불어 계유정란의 양대 주역인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세자보다 다섯 살 많은 16세였다. 이듬해인 세조 7년(1461) 11월 30일에 원자가 출생하니 세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명회 등을 궁궐로 불러들여 술을 내리고 “천하의 일에 무엇이 오늘의 기쁜 경사보다 더하다고 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다음날에는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1자급씩 올려주었으며, 모반이나 살인 등의 무도한 죄인을 제외하고 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방면하였다.
 
 세자의 나이 12세에 낳은 이 원자가 무사히 성장한다면 세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후계자 1순위였다. 세조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쿠데타 동지 한명회의 기쁨 또한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득의만만했으리라. 나이 40이 되도록 정치낭인으로 떠돌다가 시대를 잘 만나 쿠데타의 주역으로 가담하여 일약 국가권력의 실세로 부상한 것 만하여도 천운이라 여길 수 있을 텐데, 장래에 왕위에 오를 외손자까지 얻었으니 여기에 더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리만 된다면 쿠데타에 대한 항간의 시비는 패배자의 넋두리  쯤으로 치부해도 자신이 누릴 권세와 부귀에는 하등 변동이 없으리라.
 
 하지만 하늘의 섭리는 세조와 한명회의 희망과 의도를 전혀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는지 한명회의 딸인 세자빈은 원자를 낳은 지 5일 만에 산후통으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인륜과 천륜을 저버리고 너무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앗은 쿠데타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 모두들 수근 거렸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천라지망에 갇힌 꼴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2년 후인 세조 9년(1463) 10월 24일엔 두 돌도 안된 원자(인성대군)마저 죽고 말았으니 큰아들과 둘째 며느리, 손자까지 앞세워 보낸 세조와 정희왕후가 느낀 충격은 차라리 공포였으리라.
 
 비록 왕권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테타를 감행하여 집권했지만, 그 과정엔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장조카 단종 등 혈육의 목숨까지 앗아낸 비정함의 극치 또한 아로새겨져 있었기에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도 사람의 종자로서는 마음 편한 일이 될 수는 없었다. 또한 언제부터인지 세조 자신의 몸에 부스럼(종기)이 생겨 점점 썩어들어 여름엔 악취가 진동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고통 또한 자심하였을 것이다. 야사의 기록엔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는데 그 곳부터 썩기 시작했다고 세조 스스로 말했다고도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조선왕조의 국시는 배불숭유였다. 건국이념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에서 임금일지라도 이를 훼손하려 든다면 신료들의 엄청난 저항을 감수해야했다. 세조는 자신의 몸에 생긴 부스럼이나 자신의 핏줄인 아들과 손자가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며 절대 권력을 지닌 군왕이 아닌, 나약한 존재인 자연인 인간으로서 불교에 의지하여 지난 일들을 참회하였다. 자신이 빼앗아 생을 마감한 원혼들이 구천에 맴도는 이상 자신의 업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 같기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천도하는 길만이 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료들의 반대 속에 국고를 내어 전국 각지에 사찰을 짓고 중창하는 대대적인 불사가 세조대에 있었으니 이 때 중창된 사찰이 양양의 낙산사,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속리산 법주사와 복천암, 양주 회암사, 영광의 갑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다. 자신의 아버지 세종이 비록 만년에 20세 전후의 장성한 자식들과 왕비 소헌왕후를 잃고 불교에 의지하여 궁궐 내에 내불당을 짓기도 하였지만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킨 것은 조선 건국 후 세조가 처음이며, 이는 세조가 느꼈던 두려움의 발로였다고 보아야겠다.
 
 세조 10년(1464) 2월 18일. 세조는 정희왕후를 대동하고 궁궐을 나섰다. 극도로 악화된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온양행궁에 머물며 온천욕의 효험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대사(혜각존자)를 만나 부처의 설법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 받고자하는 목적이었다. 세조에게 온양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 온행은 24년 전인 세종 22년(1440)에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풍병치료를 위하여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모후를 모시고 약 한 달 간 온양에 머물렀는데, 이제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온행을 나서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마음은 춘삼월이 코앞에 서성거려도 춘래불사춘처럼 무겁기만 하였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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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1/24 [01:04]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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