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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8)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1)
안종은
 세조의 악화된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온행을 나섰지만 또 다른 목적은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 대에 있었던 불사(佛事)를 주도했으며,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 간행할 때 주관했던 인물로 ‘석보상절’의 편집을 주도했으며 ‘원각경’ 등의 불경과 많은 고승들의 법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속명은 수성(守省)이며 영산(영동) 김씨 족보에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있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근래에 와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주장도 다수 있거니와,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인 것이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방대한 양의 불경을 번역, 편찬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훈민정음의 운용과 표기법에 대해서 매우 정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세종은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들일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했다는 실록의 기록과 혜각존자라는 법호를 내렸는데 자그마치 25자나 되는 긴 법호에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으니 나라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한글의 기원은 고려시대 스님들의 각필부호와 훈민정음의 17글자가 일치하고 있다는 학설까지 대두된 상황에서 이 부분은 보다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세조 10년(1464) 2월 18일 궁궐을 나선 세조와 정희왕후는 2월 27일 저녁에 속리산 아래 너른 벌판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고 왕세자, 세조의 숙부인 효령대군, 사위 정현조, 신숙주, 신미대사의 동생인 김수온과 복천사에 올라 신미대사를 만나고 내려와 온양으로 향하였다. 김수온은 신미대사의 속가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유학에도 정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그의 시가 명나라에 까지 알려질 정도여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세종 23년(1441)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 한성부윤, 공조판서, 영충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 ‘식우집’ 복천사기 편에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또한 숙덕(宿德)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몸소 깊은 산속의 복천사에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문의와 전의를 거쳐 3월 1일 저녁에 온양행궁에 도착한 세조와 정희왕후 일행은 온양에 17일간 머물며 문무과 과거를 시행하여 문과 13인, 무과 60인을 선발하였다. 임금이 온궁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고 호종한 신하들과 온양 인근 백성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실시한 과거시험은 세조 대에 2회, 현종 대 2회, 숙종 대 1회(숙종의 안질이 악화되어 급히 환궁 하였기 때문에 온양에서 과거를 보지 않고 공주로 과거장소를 정하여 조태채를 시관으로 파견하여 과거를 시행한 바 이를 온양별시라 칭함), 영조 대 1회 등 모두 6회의 과거가 실시되었다. 온양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의 장소에 관해선 현재 위치가 어느 곳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온양을 중심으로 대개 충청지역의 유생과 어중이 떠중이 한량 수천여 명이 요행수를 바라고 운집하였으니 실로 진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실록 현종 7년(1666) 4월 10일 두 번째 기사는 온양별시에 관한 기록인데, 야외에 과장을 열어 과거를 보는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수천 명의 유생이 그대로 흠뻑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살려 달라 아우성을 치니 이를 보고 받은 현종이 과거장에서 나가고자 하는 자는 내보내주고 훗날의 규례로 삼을까 염려하여 과거를 강행하니, 수천 여명이 일시에 일어나 서로 과장을 먼저 나가려고 비에 흠뻑 젖은 채 이리저리 엎어지고 자빠지는 모양을 무어라 형용할 수 없고 겨우 56명만 답안을 제출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명색이 일국의 등용문인 과거치곤 가관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세조가 온양행궁에 머문지 닷새째 되는 3월 5일조 실록에 ‘행궁 뜰에 옛 우물이 있었는데 세조가 우물을 파게 하니 샘물이 솟아 올라왔다. 물의 근원이 깊고 맑으므로 주필신정이라고 이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펄펄 끓는 온천수가 솟아나는 옆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샘물이 솟아났으니 현대적 관점으로서도 매우 신비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보잘 것 없는 당시의 과학적 접근 방법으로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저 임금의 복록으로 여길 수밖에 없기에 신숙주 등 호종한 대소신료는 물론 한양에 남아 있던 대신들과 전국의 관리들까지 앞 다투어 경하의 글을 지어 올린 내용이 일부 전한다.
 
 세조는 온양행궁에서 휴식을 취하며 국사를 처리하는 가운데 틈틈이 시간을 내어 도고산에서 짐승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염치 송곡리에 있는 장자못도 둘러보고 문무과 급제자 73인을 호종하고 광덕산에서 가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인 세조 11년(14650 8월 17일, 세조와 정희왕후는 왕세자(후일 예종)를 거느리고 다시 온행을 나섰다. 영응대군 이염, 귀성군 이준 등의 많은 종친과 영의정 신숙주, 상당부원군 한명회, 우의정 황수신, 호조판서 노사신 등의 대소신료들이 대거 호종하여 8월 20일에 온양행궁에 도착하여 9월 10일까지 머무르며 국정을 처리하였다. 지역에 관계된 실록의 기록은 광덕산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주로 세자에게 온양 인근에 나가 매사냥 등 주로 사냥하는 것을 참관하라는 것이 5~6회 정도며, 6년 전에 혁파되어 현(縣)의 지위를 상실했던 아산현을 복구하였으니 ‘아산현을 다시 세웠다’라는 실록의 기록으로 세조 11년(1465) 9월 5일이었다.
 
 아산현의 복구 문제에 관해서는 전 해 있었던 세조 온행시에 전 아산현감 조규(趙珪)가 호소하였으며, 세조 환궁 후에도 도승지 노사신이 아산현의 복구를 건의하여 의정부에서 가부를 논의하라는 어명이 있었으나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아산현 혁파의 발단은 세조 5년(1459) 1월 23일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의 상소였는데 이를 읽은 세조는 이날부로 아산현을 혁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소의 내용은 아산현의 아전들이 속임수를 써서 수령인 현감을 모해(謀害)하기를 일삼고 관사가 허물어졌는데도 수리할 목재가 없으며, 관아의 터가 큰 물에 가까워 장차 가라앉을 형세라는 것이었다. 아산현을 혁파하여 토지와 백성은 인근의 온양군, 신창현, 평택현에 나누어 붙이고 아전들은 온양군 소속으로 하며 노비들은 6역(驛)에 나누어 분배해달라는 것이었다.
 
 황효원의 상소에 대응하여 아산출신으로 고위직 벼슬인 판충추원사로 있던 김구(金鉤)와 현감 조규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현 혁파의 부당함을 세조에게 강력히 호소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아산현 혁파 당시에 진휼사로 아산에 머물던 좌찬성 황수신은 아산현의 토지와 백성 등이 인접한 군·현으로 분배되는 과정에서 철저히 계산된 행동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황수신은 세종 대 명신인 황희의 셋째 아들로 세조 12년 영의정에 올라 조선시대 최초로 부자가 영의정에 오른 대신으로 어지간한 벼슬아치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권력자였다. 황수신은 아산현의 재산인 관둔전과 채소밭 일부를 빼돌리고 아내의 묘터를 아산에 정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어 묘터를 하사받았으며, 48간 기와로 된 아산현 관아를 22간의 초가라고 속여 사들인 뒤에 이를 팔아서 소위 시세차익을 얻으려 하였다.
 
 토지의 소유자였던 아산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2년 후 황수신의 토지 강탈 사건이 고소사건으로 비화되었으니 세조실록 7년(1461) 5월 12일 두 번째 기사에 ‘사헌부에서 충청도 아산현의 관노 화만이 좌찬성 황수신의 죄를 고발한 것을 아뢰다’라는 내용이다. 황수신이 탈취한 채소밭은 본래 아산현의 관노비인 화만이 조상 대대로 소유했던 토지였으며, 이를 잠시 임시로 기한을 정하여 아산현에 빌려주었던 것인데 현이 혁파되면서 황수신이 소유권을 행사하자 화만이 사헌부에 황수신을 고소한 것이었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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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01 [00:47]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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