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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19)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2)
안종은
 아산의 관노 화만(禾萬)의 고소를 접수한 사헌부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 황수신을 탄핵하였다. 황수신은 사헌부가 아닌 다른 기관에서 조사를 받겠다고 하며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사헌부의 거듭된 조사 결과 토지의 불법 탈취 외에도 관노의 점유, 사적인 일에 일반 백성의 부역을 동원한 일 등의 비리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사헌부의 탄핵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사헌부의 거듭된 황수신의 처벌 주장에 대하여 세조는 매우 곤혹스러웠던지 특별히 친필을 내려 “공신은 죽을죄를 졌어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조그만 온정도 베풀지 못하겠는가?” 하였으며 “용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임금을 거듭 괴롭히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며 황수신을 적극 옹호하였다. 세조는 자신의 정권찬탈과 집권에 협조한 공신들에 관해서는 역모와 관련된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 한 공신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누누이 공언했기에 황희의 아들이며 좌익공신인 황수신을 처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공신을 모함하였다는 죄로 화만이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김구와 조규가 화만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고신(告身:직첩)을 회수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세조실록 8년(1462) 3월 6일 첫 번째 기사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산의 관노 화만은 비록 어리석어 미혹되고 무지하다 하더라도 김구와 조규의 사주를 받아 대신을 고소하였으며, 김구와 조규는 아산현을 회복할 것을 도모하여 대신(황수신)의 허물을 두루 기록하였다가 몰래 화만을 부추겨 고소하였으니 법에 따라 죄를 주소서”하니 김구와 조규의 고신과 과전을 회수하 나머지 사람은 모두 논하지 날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다. 김구가 고신 회수의 중벌을 받은 시점은 사건에 대한 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김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아무런 이득도 취한 바가 없으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행정명칭인 아산현을 복구해달라는 건의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 밖에는 없었다.
 
 김구와 함께 처벌 받은 조규는 6품직의 현감에 불과했으나, 김구는 판중추원사라는 종1품직에도 있었으며 처벌 받을 당시에도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로 있던 소위 고위층 인물이었다. 세조는 황수신이 공신이기 때문에 죄를 줄 수 없다 했지만 김구 또한 황수신 보다는 중량감이 덜하지만 간접적으로 세조의 집권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원종공신 1등에 봉해진 대신이었다. 비록 김구가 아산 관노 화만을 사주하여 황수신의 비리를 고소했다 해도 고신과 과전인 토지까지 회수할 중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세조가 김구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은, 당시에 이미 세조와 김구 간에 개인적 감정의 앙금이 쌓여있던 것이 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 세조실록 7년 6월 5일 첫 번째 기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김구는 벼슬길에서 쫓겨난 지 25일 만인 4월 1일에 고향 아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세조실록 8년(1462) 4월 9일 기사 그의 졸기에 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죽은 김구의 고신을 돌려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구는 아들도 없고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어 관에서 대행해줄 정도로 청빈하였다. 당시에 문학으로 진출한 자는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는데 어렸을 때는 집이 빈한하여 몸소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부모를 봉양하는 효자였다. 시호를 문장(文長)이라 내렸으니 학문이 넓고 견문이 많음을 문이라 하고 교회(敎誨)하기를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장이라 한다고 사관은 기록하였으니 이는 김구가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최고의 찬사였다.
 
 김구(金鉤 ?~1462).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귀산(歸山)으로 아산에서 태어났다. 출생 년대의 기록이 문헌 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80이 넘어서 1품직에 올랐다는 ‘필원잡기’, ‘여지인물록’의 기록과 그의 ‘신도비명’에 고려 우왕 5년(1379)출생으로 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면 84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실록의 졸기에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으며, 집이 빈한하여 몸소 나무를 하고 물을 길러 부모를 봉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아산의 토호세력은 아니었으며 한미한 집안의 출신으로 여겨진다. 이는 김구가 고신과 나라에서 내린 과전을 빼앗긴 후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집안이 대대로 지역의 토호세력이었다면 비록 나라에서 내린 과전을 몰수당했다 해도 물려받은 재산만으로 장례 비용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1819년(순조 19)에 간행된 ‘아주지’에 의하면 현 영인면 신화리 고용산 자락 부근과 숯골로 불리던 음봉면 신수리로 추정된다.
 
 김구가 문헌상에 등장한 첫 기록은 태종실록 16년(1416) 8월 17일, 문무과의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문과 중시 5인, 친시 9인의 합격자 중 친시 3등으로 합격한 김구를 ‘사온서 직장’으로 삼았다 라는 기사다. ‘사온서’는 궁중에서 쓰는 술과 감주(식혜)등을 생산 감독하는 관청으로 직장(直長)은 종7품직이니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에 얻은 벼슬치곤 한직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에 홍주판관을 거쳐 세종 21년(1439) 8월 11일 기사에 “성균관 사예 김구는 종학박사가 된 후 가르치는 일에 근무한지가 5년째인데 안질로 사직하게 되었으니 한관(閒官)에 서용하소서” 라고 종친 경녕군 이비 등 19인이 상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종학(宗學)은 대군 이하 종실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종 10년(1428)에 설치한 기관으로 김구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 초기 몇 년과 나이 70이 넘어 불과 몇 달간 우사간대부나 종부시판사 등 교육외의 벼슬직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줄곧 성균관과 종학에서 유생들과 종친들의 교육에 종사한 뛰어난 교육자였다.
 
 단종 즉위년 나이 75세에 비로소 집현전 실무 책임자인 정3품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과거 성적과 능력에 비하면 진급이 매우 더디다 못해 그의 나이로 보면 민망할 정도의 하급관직에 머물러 있었으니 이는 그의 출신가문이나 연줄의 미약함이 그 원인의 하나였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그가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세조 즉위 후 2품직인 중추원부사에 임명되고 성균관 유생교육을 전담하는 성균관사성의 직책까지 겸하게 되니 이는 ‘국조보감’의 “김구는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의 종학박사로 세조가 무척 예우하였던 사람이다”라는 기록과 무관치 않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20세 전후에 세종이 설치한 종학에서 김구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스승으로서의 예우를 차린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세조 자신이 쿠테타로 집권을 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결여로 인한 성균관 유생들의 반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정치적 접근방법의 일환으로 해석함이 타당하겠다. 세조는 김구 이외에도 성리학과 경서의 해석에 정통하여 당시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던 김말, 김반 등 유생들의 존경을 받던 70세 이상의 원로들을 성균관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혁파된 아산현을 복구하고자 논의하는 과정에서 세조의 미움을 사 고신을 삭탈당하고 낙향하여 죽은 김구에 대해서 교육계를 포함한 학계의 연구결과는 매우 소소한 편이다. 그가 남긴 문집이라도 있었으면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수월하겠지만, 실록 등 매우 제한적인 문헌상의 기록에 드러난 것만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사후 수백여 년이 지나 그의 후손들에 의해 편찬된 ‘귀산김선생실기’ 등의 기록물이 있지만, 이는 후손들의 조상 추숭작업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왜곡과 날조가 너무 심하여 사료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보아야겠다. 김구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의 관직에 올랐다는 기록은 실록을 비롯한 김구 생존 당시의 그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현 영인면 구성리에 있는 오교대(五敎臺) 옛 터도 김구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교대는 옛날 어떤 선비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모아 삼강오륜 등을 가르쳤다는 유래가 전하는데, 지역에서 발간된 일부 책자에는 오로지 ‘귀산김선생실기’에 실린 ‘김구가 고신을 삭탈당하고 낙향하여 오교대를 축조하고 향리의 영재들을 모아 교육하였다’라는 부분을 즐겨 인용하는 바,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른 것이 벼슬에서 쫓겨나 25일 만에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서언해’, ‘손자주해’ 등을 번역하였고 40여년 관직 대부분을 교육에 이바지하여 종실과 유생들로부터 사표(師表)로 추앙받은 김구! 80노구에도 온 몸을 던져 혁파된 고향의 명칭을 되찾기 위하여 고향사랑의 징표를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한 아름다운 사람, 자랑스런 아산인이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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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07 [01:06]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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