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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0)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3)
안종은
 세조 13년(1467) 5월. 함길도(함경도) 길주 출신의 토착 양반 출신인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토호세력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등의 대북방민회유책을 실시하여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하였다. 이시애 또한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호족 출신으로 세조 즉위 후에도 경흥진병마절제사를 거쳐 회령부사에 오를 정도로 특혜를 누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 관계는 오래 가질 못했다. 강력한 왕권을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세조가 점차 중앙집권화 시책을 펼쳐 북방 출신 인사의 등용을 배제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직접 임명하여 보내고, 전국적으로 호적을 개정하고 호폐제도를 시행하니 이는 대토지와 인정(人丁)을 소유한 지방토호세력은 물론 농민들에게도 군역의 과중한 세금을 엄격히 부과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함길도 각지의 토호세력과 농민들이 호응하여 거대한 반란세력이 형성되어 함길도 대부분의 지역이 반란군에 점거되었다. 세조는 도총사에 귀성군 이준(1441~1479), 부총사에 호조판서 조석문을 임명하고 어유소, 남이(1441~1468), 강순, 허종, 유자광 등 문무관을 가리지 않고 장수의 자질이 있는 자를 위주로 배속시켜 토벌군을 편성하니 병력은 3만이었다. 귀성군 이준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며, 남이는 할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고 권람의 사위였으며 이미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할 정도로 주목 받는 인물이었으니 이준과 남이는 동갑으로 27세였다. 이시애 군은 철원까지 내려올 정도로 초기에는 위세를 떨쳤지만 토벌군에 밀려 홍원과 북청전투에서 연달아 패하고 전의를 상실하여 도주하다 8월 12일 영동역에서 이시애가 토벌군에 붙잡혀 참수됨으로서 반란은 백여 일 만에 종결되었다.
 
 “북청전투에서 남이는 진(陣) 앞에 출몰하면서 사력을 다해 싸워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그는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낯빛이 태연했다”라고 실록은 전한다. 이시애의 반란을 제압한 후에도 건주위 여진을 토벌하여 족장인 이만주를 죽이는데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 남이는 전공을 인정받아 공조판서에 오르고 다음해인 1468년에는 국방을 총괄하는 병조판서에 임명되니 그의 나이 28세였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南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자가 20세 되어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부르리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여진을 평정하고 지었다는 이 시는 장부의 기개가 넘치는 호방함을 느낄 수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정치적 야망을 엿볼 수 있기에 야사의 기록엔 이 시로 인하여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자광이 평(平)자를 얻을 득(得)자로 고쳐 남이가 역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유자광은 호조참의를 지낸 유규의 서자로 국조인물고에 “유자광은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숭이처럼 하였다. 어려서부터 무뢰자가 되어 장기 바둑으로 재물을 다투었고 밤에 길을 떠돌면서 여자를 만나면 끌고 가서 간음하였다” 라고 악인으로 규정하였다. 이시애의 난에 출전하여 세운 공로로 정5품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세조 온행시에 호종하여 온양별시문과에 응시, 시험관인 신숙주가 낙방으로 처리하였으나 세조의 특명으로 장원급제 하였다. 후일 연산군 대에 김일손 등을 무고하여 많은 유림을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켜 부귀와 권세를 누렸으나 역사의 기록은 그를 간신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시애의 난 등으로 불면증과 피부병이 극도로 악화되어 심신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세 번째 온행에 나서니 세조 14년(1468) 1월 27일이었다. 정희왕후 윤씨와 세자(예종)를 거느리고 궁궐을 나서 사흘만인 1월 30일 온양행궁에 도착하여 38일간 머물다 3월 9일 환궁하였다. 세조는 온천욕의 효험을 얻지 못하고 환궁한지 6개월 후인 9월 8일에 눈을 감으니 나이 52세며 재위 14년이었다.
 
 세조는 등극 후 왕권을 강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국정의 안전을 이루었지만, 쿠테타를 통한 집권 과정에서 수 많은 공신들을 배출했던 탓으로 이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예종의 정치적 위상은 공신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권위를 세우기도 버거운 현실이었다. 이미 세조는 “공신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졌더라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 (세조실록 8년 2월 30일 사헌부의 상소 내용 ) 라고 말했을 정도로, 공신 집단은 역모에 가담하지 않는 한 국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절대 특권계급이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하는 쿠테타를 통하여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하는데 기여한 정난공신 40인, 단종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즉위에 기여한 좌익공신 42인,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적개공신 43인 등의 공신을 책봉하였다. 이는 정국이 매우 혼란스럽다는 뜻이며 왕과 공신세력이 연합한 요즘 표현으론 집단 지도체제 성격을 띤 공동정권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의 병이 도저히 치유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한 세조는 재위 14년 7월 19일, 신숙주, 구치관, 한명회 등을 불러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한다”라는 말을 하였으나 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다. 7월 20일에 여러 종친들과 재추(재상)들이 세조의 병문안을 왔을 때 이들과 의논하여 대역 모반, 조부모나 부모 살해, 고의적인 살인 등의 극악한 범죄자를 제외하고 전국적인 대사면령을 내려 모두 방면하였다. 8월 1일, 세조는 노사신에게 “이제 수릉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렸다. 수릉(壽陵)이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릉을 말한다. 실록은 세조가 눈물을 뿌렸으며 노사신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모든 재추들도 눈물을 흘렸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군신간의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다.
 
 8월 27일, 세자는 다시 대사면령을 내려 하늘의 자비를 구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며, 내전에 불상을 안치하고 기도를 올렸으나 이미 세조의 병은 백약이 무효한 상태였다. 세자는 마지막으로 결자해지 차원에서 세조가 생전에 지은 업을 소멸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계유정란과 사육신 사건으로 인하여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에 대한 방면과 사면 문제를 9월 3일 승정원으로 하여금 의논케 하였다. 두 사건에 관련되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족들은 이미 공신들에게 노비로 나누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자는 의미였다. 이에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김질 등 공신 10여인이 의논하여 아뢰길 계유정란의 관련자 가족들의 방면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들의 가족은 세월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에 세자는 “만약 난신에 연좌된 자들을 모두 방면하기로 한다면 어찌 세월이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논하겠는가?, 공노비가 된 자는 방면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자들까지 방면한다면 공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공신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사위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하도록 한 정창손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는 두 사건에 관련된 피해자의 가족과 친족 일부를 방면케 하니 200여인에 달했다.
 
 좌익 3등공신으로 책봉된 좌의정 박원형은 계유정란 때 처형당한 양옥의 누이 의비를 여종으로 받았는데, 의비를 대신하여 다른 여종으로 내놓겠다고 하였으나, 세자는 이미 의논하여 정해진 일이라 불가하다고 하였다. 성노리개의 대상으로 삼은 불편한 진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세조는 죽기 하루 전인 9월 7일 전위를 반대하는 공신들에게 “운(運)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일갈하며 환관으로 하여금 면복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주고 즉위하게 하였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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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2/21 [16:57]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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