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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1)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4)
안종은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와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인 의경세자(덕종)가 급서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이 세자 자리를 이어받아 세조 사후 왕위에 오르니 예종이다.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을 치달을 정도로 상반되는데, 어린 조카 단종의 보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살육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피의 군주, 즉위 후 나름대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치적 군주 등으로 양면성을 띤다.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두만강 건너 야인을 신숙주로 하여금 토벌케 하고 강순, 어유소, 남이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의 북방개척,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세수를 증대하는 직전법 시행, 궁중에 잠실을 두어 왕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많은 농업서적을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 국조보감과 동국통감 등의 사서편찬,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 간행, 법전의 정비 등은 세조대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세조는 자신의 집권과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닌 공신들을 너무나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에 이는 고스란히 후왕인 예종의 정치적 부담으로 대물림 되었다. 위세등등한 공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왕 노릇은 고사하고 공신들의 위세에 짓눌려 자칫하면 허울만 있는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할 것이라는 인식을 예종 또한 간과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세조가 공신들을 다루던 방법으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 세조실록에는 무려 4백 수십여 차례나 술자리 관련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 세조가 종친, 공신, 고위관리를 우군으로 확보하기 위한 친화책으로 술자리 자체가 통치행위의 주요한 방편이었다.
 
 세조의 술자리는 낮과 밤 구별 없이 수시로 있었는데, 세조는 즉위 후 재위 14년간 심한 역창(피부병. 나병<문둥병>이란 추측설도 있다)과 밤이면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일종의 정신병적 망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1984년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유물에서 세조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피고름에 절은 속적삼이 나왔는데, 피부병과 정신질환에 있어서 술은 오늘날에도 절대 금기시되고 있으니 세조의 잦은 술자리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와 자신의 아들인 정현조가,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혼인을 하여 세조와 사돈지간인 정인지는 세조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여러 번 대취하여 세조에게 너(爾)라고 불렀다가 파직당하는 곤욕을 치루었으며, 성균관 대사성 서강은 술자리에서 세조와 불교에 관계된 논쟁을 하다 벌주를 연거푸 받아 마시고 만취하여 불경스런 말을 했다가 사형을 당했으며, 정난공신 2등과 좌익공신 2등에 각각 책록된 양정은, 공조판서.지충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잠시 역임하고 주로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한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세조가 이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 술김에 세조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선위하라는 말을 운운했다가 참형에 처해졌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조는 사망 오십여 일 전인 재위 14년 7월 17일에 이시애의 반란 진압군 대장이었던 귀성군 이준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던 8월 23일에는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니 그들의 나이 28세였다. 그들이 비록 능력이 출중한 종친이며, 전장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해도 정치적 능력이 미지수인지라 이는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세조는 이들을 통하여 자신의 즉위과정에서 공을 세운 기득권 세력인 훈구공신을 견제하기 위하여 취한 행보였지만, 문제는 세조가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초기 단계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예종 즉위 후 훈구공신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남이는 역모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이준도 영의정 자리를 한명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선왕인 세조의 오랜 측근인 구공신 세력과 이준, 남이 등 신진세력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정국을 물려받은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제어하지 않고는 허수아비 군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위 후 공신들의 특권을 해제시키는 강경책을 동원하였으니, 인사청탁과 관직매매 등 정치사회적 비리의 온상인 분경금지 선포가 그것이었다. 예종실록 즉위년(1468) 10월 4일 ‘권세가에 벼슬을 청탁하는 자나 마음대로 왕래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리게 하다’ 라는 기록이다. “이를 위반하면 종친,재추,공신일지라도 즉시 목에 칼을 씌우고 숨김이 있으면 마땅히 족주(族誅 일족을 죽임)하겠다” 라고 어명을 내렸으나 영의정 이준과 우의정 김질이 족주법은 너무 지나치다고 항의 하자 이를 받아들여 ‘본인을 극형에 처한다’라고 고쳤다. 신공신 이준과 구공신 김질 모두 공신들의 특권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힘을 합친 결과였다.
 
 그러나 예종의 분경금지 등의 강경책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두사미가 되었으니 남이의 역모 사건 등으로 인한 정국의 변화와 훈구세력의 반발로, 조정에 이렇다 할 측근세력조차 없었던 예종으로서는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공신들이 지방관리와 결탁하여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대납하고 후에 서너배로 징수하는 대납은 민폐의 상징이어서 예종은 이를 척결하고자 노력하여 약간의 성과도 있었지만 재위기간이 불과 14개월 남짓으로는 구악을 척결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예종은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부왕 세조의 유산인 공신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왕권 강화를 통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파의 견제는 물론, 모친인 정희왕후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예종의 독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니, 예종 사후 정국의 전개과정이 마치 사전에 잘 짜여진 각본처럼 정교하게 펼쳐진 점과 예종 시신의 변색 등으로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아야겠다.
 
 예종은 재위 14개월만인 1469년 11월 28일에 2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실록에는 열흘전인 11월 18일에 예종의 병명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니, “내가 족질(足疾)로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라고 승정원에 물었다는 기록이다. 예종의 자신의 병명이 족질이라 밝히고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다고 했지만, 불과 2일전인 11월 16일엔 ‘충순당에 나아가 입직한 군사들을 후원에 모아서 친열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전에도 국왕으로서의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한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니 의아해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예종은 죽기 사흘전인 11월 25일까지 정상적인 정사를 수행하고 11월 26일 새벽에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의학에 정통한 한계희와 임원준을 불러들였다. 이날 처음으로 고위관리 및 정희왕후의 족친인 외가붙이 등이 병문안을 하였다.
 
 예종은 죽기 하루전인 11월 27일에도 조선에 투항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와 또 다른 야인 마금파로 건을 처리하고 28일 진시(오전 7~9시)에 숨을 거두었는데, 마치 예종의 죽음을 미리 알아 대처했다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국은 물 흐르듯 전개되어 당일 신시(오후 3~5시)에 신왕인 성종이 근정문에서 즉위하였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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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08 [01:00]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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