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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2)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5)
안종은
 통상적으로 왕의 급서는 정국의 혼란을 초래하여 혼미한 정국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후계구도를 완벽히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심지어 정변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종의 급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한 연출처럼 당일에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니 성종이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새벽에 승정원에 한명회, 신숙주등 8명의 원상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원상(院相)이란 조선조에 임시벼슬의 일종으로 왕의 병이 위중하여 국정을 살필 수 없을 경우 또는 어린 왕이 즉위하여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불가능한 경우 재상들로 구성하였다. 이때 구성된 원상은 세조의 공신들로 성종이 정희왕후의 수렴첨정을 벗어나 친정하게 되는 성종 7년(1476)까지 지속되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인 예종의 급서로 인하여 정희왕후는 정치일선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 첫 번째 정치행위가 왕위계승에 관한 개입이었다. 예종 사망 당일에 원상들과 도승지 권감은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와 정희왕후의 소생인 의숙공주의 남편 정현조에게 정희왕후에게 가서 왕위계승자를 빨리 정해야한다고 아뢰길 재촉한다. 왕조국가에서 제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가진 실세일지라도 신하된 몸으로 왕위계승권을 언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당시 궁중의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에게 공을 넘기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후 정희왕후는 드디어 차기 왕위계승자를 말하는데 “원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조께서 매양 그의 도량과 기상을 일컬으면서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의 원상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진실로 마땅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는 기록과 신숙주가 최항과 더불어 월산군을 주상으로 삼는다는 정희왕후의 교서를 찬술하고 호위무사들을 보내어 자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 대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은 속된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한 연출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정상적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군이나, 제안군의 사촌이라도 자산군의 형인 월산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정희왕후와 세조의 공신들인 원상들간의 사전 조율에 의해 한명회의 사위인 자산군이 13세로 즉위하니 성종이다. 제안군은 당시 원자였으나 불과 네 살의 나이여서 왕위계승이 불가하였다면 16세의 월산군이 왕위를 잇는게 정상이었다. 예종의 급서에 많은 의문점을 시사하는 기록이 실록에 보이는데 예종 사후 이틀 후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기사에 원상과 승지들이 정희왕후에게 아뢰길 “어제 염습할 때 이미 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라는 기록이다. 통상적으로 시신의 변색은 약물중독 등으로 생기기 때문에 어의의 처벌을 사헌부 등에서도 여러차레 주청하였지만 정희왕후는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예종 사후 두달 후인 성종 1년(1470) 2월 7일에 어의였던 권찬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권찬은 후일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숨을 거둘 때에 시종했던 어의였다.
 
 제안대군. 예종의 차남으로 안순왕후 한씨에게서 태어났다. 배다른 형은 인성대군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인 장순왕후의 소생이었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제안대군은 예종이 죽을 당시에는 원자로서 왕위계승 1순위였다. 그러나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사촌형인 자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정치권력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남은 삶을 살아야 했다. 세종이 보위에 올라 양녕, 효령대군 등 두 형님을 예우한 것처럼 성종 또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왕실의 중요한 행사나 연회에 모시어 받들었고, 두 대군도 정치적인 것들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모범적인 처신을 하였다.
 
 정통성이 취약한 성종의 왕위계승은 제안대군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칫하면 후일 큰 화근이 될 수 있었다. 결국 고육책으로 정희왕후와 훈구세력은 제안대군의 적통을 빼앗아,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켜 버렸다. 그는 비교적 장수하여 60세에 죽었는데 중종실록 20년(1525) 12월 14일 그의 졸기에 “예종의 아들로 성격이 어리석어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라는 기록처럼 제안대군은 노래를 매우 잘 불렀으며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추강(秋江)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워도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동생 임금 성종이 지어준 정자의 이름이며, 또한 자신의 호인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의 작품으로, 무욕(無慾)의 경지가 끝 간데 모를 정도로 깊고 담담하지만 그의 삶의 이력을 조금이라도 짚어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진한 페이소스를 유발하게 하는 서러움도 담긴 작품이다. 월산대군은 동생인 자산군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았다. 예종 사후에 적자인 제안대군이 네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열여섯 살인 월산대군으로의 왕위 승계는 오히려 동생인 자산군이 왕위를 잇는 것보다, 명분과 원칙에서도 오히려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월산대군은 할머니 정희왕후의 지목을 받지 못하고 동생인 자산군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라는 통설을 증명함에 있어 실록 또한 여러 곳에서 월산대군의 병약함과 소심함을 자주 언급하고 상대적으로 자산군의 담대함을 비교하여 궁극적으로 자산군으로의 왕위계승의 당연성을 부각시키는데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 성종실록 총서에 “자산군(성종)이 어렸을 때 일이다. 친형 월산대군과 함께 궁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천둥이 쳤다. 옆에 있던 어린 환관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넘어지며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자산군만이 홀로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과 행동이 태연자약하였다”
 
 자산군으로의 왕위계승 이면에는 무엇보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의 의중도 중요하였으나, 문헌의 기록엔 드러날 수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월산대군과 자산군의 생모인 인수대비 한씨의 뜻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의경세자(덕종)의 세자빈이었던 한씨는 의경세자가 급서하고 해양대군(예종)이 세자로 결정됨과 동시에 동궁을 넘겨주고 21세 청상의 나이로 4세된 큰아들 월산대군, 2세된 딸 명숙공주, 5개월 된 막내아들 자산군과 함께 궁궐 밖으로 나와 살아야했다. 그녀는 비록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으로 왕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즉위시켜 대비에 오르고, 후일 손자인 연산군으로부터 생모 윤씨를 폐위 사사시킨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사극드라마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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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25 [15:49]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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