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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은 연재 - 웅녀의 딸들(23)
정희왕후-철녀지존 온양에서 지다(16)
안종은
 예종의 급서 후 비록 원자의 지위를 지녔지만 불과 네 살인 제안대군으로의 왕위계승은 너무 어린 나이 탓에 불가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을 제쳐두고 둘째 아들인 자산군으로 왕위를 넘기면서 세조의 유언이나 월산대군의 병약함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에 다름 아니었으며, 본질적인 내막은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 간의 정치적 결탁의 결과였다.
 
 제안대군 다음으로 왕위계승 첫째 순위인 월산대군의 장인은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박중선으로서 손위 누이가 세종비였던 관계로 음보로 벼슬길에 오른 무관출신이었다. 박중선은 1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원종으로 후일 연산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의 주동인물이고, 첫째 딸을 월산대군, 일곱째 딸은 제안대군에게 출가했지만 세조와 쿠테타 동지인 한명회나 원상들이 누리는 정치적 위상에는 많이 부족하였다. 넷째 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낸 한명회로서는 세째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외손자 인성대군의 급서라는 1년전의 상처를 잊고 다시 한번 국구로서의 화려한 비상을 꿈꿀 수 있게 되었으며, 원상들 또한 정통성이 부족한 자산군으로의 왕위승계에 협조하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더 많은 권력을 나누어 갖게 되었으며, 세자빈으로서 마무리 될 줄 알았던 내명부 지위가 아들의 왕위계승으로 대비의 지위에 오르게 된 인수대비(실질적 왕비는 못되었으나 성종 즉위 후 곧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여 왕비가 됨),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희왕후 등 자산군의 성종 등극은 많은 정치적 함의를 띤 결과였다.
 
 왕이 어렸기 때문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희왕후는 신숙주 등으로부터 수렴청정을 요청받고는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해서 정사를 청단하기가 어려운데, 사군의 어머니 수빈은 글도 알고 또 사리도 알고 있으니 이를 감당할 만하다” 라고 말하며 두 세번 사양하였다. 자신은 한자를 배우지 않아 모르기 때문에 국정에 관계된 일을 듣고 처리하기가 어렵지만, 새 임금의 생모인 수빈(인수대비)은 학식도 있고 사리판단도 잘 하니 인수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면 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형식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 사양지심의 표출에 불과하였다. 정희왕후가 여인으로서는 조선 최초로 명목적인 최고의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해서 지아비 세조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르거나 여왕처럼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적 책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내몰며 빼앗은 보위를 자신의 핏줄들로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 즉 왕권의 안정 이었다. 부왕 문종의 급서로 단종이 보위에 올랐으나, 믿고 의지할만한 외가나 처가가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숙부이며 자신의 지아비 세조에게 이렇다 할 항거 한번 제대로 못하고 보위는 물론 목숨까지 내놓은 단종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예종이 급서하는 정국의 불안정 속에서도 한명회와 결탁하고 그의 사위 자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오로지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유일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성종이 즉위하고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홍윤성 등 원상들인 구공신 집단에게 있었다. 성종이 즉위하고 한 달 남짓 지난 성종 1년 1월 2일, 직산 사람 생원 김윤생과 별시위 윤경의가 승정원에 찾아와 전 직장 최세호를 역모로 고변했다. 최세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을 멸시할 수 없다. 우리 귀성군은 왕손이 아닌가? 숙부 길창군(권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귀성군은 건장하고 지혜가 있으니 신기(왕위)를 주관할 만한 사람이다’ 고 말했다. 지금 어린 임금을 세웠으니 나라의 복은 아닌데, 어찌 왕위의 결정을 잘 못 했을까? 내게 권세가 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세호는 귀성군의 어머니와 친족이었다. 원상들이 귀성군 이준을 제거하고자 최세호와 증인들을 심하게 추국하였으나 최세호는 모진 고문을 견디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1월 8일에는 사헌부 지평 홍빈이 아뢰기를 최세호의 난언에 이준이 언급되었으니 가두어 국문하고 최세호의 국문이 끝난 후 귀성군의 죄를 결정하라는 주청에도 귀성군 이준은 참여한 적이 없다고 물리쳤다. 실질적으로도 최세호의 난언과 귀성군 이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귀성군 이준은 세조와 정희왕후가 매우 아끼고 사랑했던 조카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을 정도로 국가에 큰 공훈을 세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쌍벽을 이루던 남이가 제거된 마당에 귀성군 이준은 구공신 집단의 구성원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세조는 말년에 젊고 능력있는 종친들을 내세워 구공신을 견제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중에 삶을 마감하였다. 28세 젊은 나이에 영의정과 병조판서라는 최고위직에 오른 이준과 남이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남이는 이준의 중용을 비판하다가 하옥되기도 하였으며 이준은 5개월 후 예종 때 역모혐의로 빚어진 남이의 옥사 때 구공신의 핵심인 한명회의 편에 서서 남이를 제거한 공으로 익대공신 2등에 올랐을 정도였다. 남이가 누구인가? 한명회와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며, 수양대군에게 자신을 천거한 권람의 사위였으니 한명회는 친구의 사위를 제거하는데 앞장섰으니 권력다툼의 비정함이야 새삼 다시 논하여 무엇하리!
 
 1월 9일과 10일에도 사간원 헌납 장계이와 대간들이 이준을 가두고 국문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몇 날을 두고 구공신 세력들은 이준에 대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는 옛 허물도 아닌 사건마저 들추어내며 이준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신숙주가 아뢰길 “준이 비록 작은 공로가 있지마는 돌볼 것이 되겠습니까? 원컨대 선왕 때의 죄를 다스려서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외방에 유배시키소서. 이것이 사실은 보전시키는 것입니다” <성종실록 1년 1월 13일>. 실록에 실린 문맥의 내용만 보더라도 이는 차라리 협박에 다름아니었다. 선왕 때의 죄란 것이 세조 때에 나인과 통정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미 당시에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된 사건이었다. 폐서인하여 유배 보내는 것이 오히려 이준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수렴청정하는 정희왕후의 면전에 대놓고 말할 수 있는 힘! 권력의 현주소는 정희왕후보다는 원상들인 구공신 집단에게 있었다.
 
 지난 세조 때의 일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이준에겐 죄가 없었다. “이준에 관하여 여러 소인배들이 스스로 나쁜 말을 만들었을 뿐, 나인과의 사건 또한 세조께서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지금 소급하여 논죄할 수도 없다. 다시 생각은 해보겠다” 라고 정희왕후가 이준의 무죄를 내세웠으나 신숙주, 홍윤성, 대사헌 이극돈 등은 집요하게 이준의 처벌을 주청하였다. 다음날인 1월 14일 문무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대궐 뜰에 모였을 때, 정인지는 이준을 서울에 두어서는 안 되며 유배 보낼 것을 종용하였다. 정희왕후로서는 아무 죄도 없는 이준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기에 의정부에 명하여 판서 이상의 고위관료와 가까운 종친 및 승지들을 불러 모으고 “이준은 세조께서 돌보아 사랑한 사람인데, 지금 밖에 쫒는다면 아마 세조의 뜻에 어긋날 듯하다” 라고 죽은 세조까지 들먹이며 이준을 옹호하였다. 신숙주가 말하길 “준이 세조조에 있으면서 큰 죄를 범했는데도, 세조께서 임영대군(이준의 부친, 세조의 둘째 동생)을 우애하여 차마 법에 처하지 못했던 것인데 만약 오늘날에 있었다면 세조도 또한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니 법으로 빨리 결단하소서” 라고 촉구하니 정희왕후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마지못해 따르게 되니 경 등은 잘 처리하라” 하니 대소신료들이 물러가서 상의하여 서면으로 아뢰길 “이준은 공신의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직첩을 회수하며, 경상도 땅 영해에 안치하고 가산을 적몰시키소서” 하니 정희왕후가 전교하기를 “마땅히 그로 하여금 안심하게 떠나도록 하고 가산까지 적몰할 수는 없다” 라고 재산은 지켜주었으나, 한시절의 기린아 귀성군 이준은 성종 10년 1월에 죽을 때까지 경상도 영해에서 9년간 울분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 안종은     © C뉴스041
 <필자 - 안종은>
 
- 아산시 좌부동 초원아파트 거주
- 온양아산신문 <현대시평>1년 연재
- 용화동 소재 아나고구이 전문점<통영바다>에서
  『장자』「양생주편」‘포정해우’에 나오는
   ‘긍경(肯경)의 도(道)’를 얻기 위하여 ‘포정(庖丁)의
   칼’을 빌려 아나고를 가르고 있음.
- 손전화 011-9811-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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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26 [22:41]  최종편집: ⓒ C뉴스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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